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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br>주요한의 기록, 그 진실은?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도산안창호포럼 제3집 ‘애국가 작사와 도산안창호’에는 대부분의 필자들이 ‘친일파 지식인’이란 규정하에 이병도 백낙준 서정주 윤치영”을 나열하고, 이어 "국학의 대가 최남선, 서지학자 황의돈, 안창호와 함께 상해에서 일했던 주요한 등이 안창호 작사설을 주장”했다고 하였다. 이 중에 주요한朱耀翰)은 ‘安島山全書’라는 방대한 저술에서 ‘애국가’ 항목을 두고 세 번에 걸쳐 작사자에 대해 거론한 인물이다. 그런민큼 누구보다도 주요한의 작사자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게 된다. 이를 짚어 보기로 한다. 안창호의 생애를 다룬 대표적인 전기(傳記)는 이광수의 ‘도산안창호’와 주요한의 ‘安島山傳記’이다. 전자는 안창호를 "도덕주의자의 거울”로, 후자는 "민주적 지도자의 전형”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이 두 자료는 애국가 작사자 문제에서도 평가를 받는다. 이 두 저자는 안창호가 임시정부 조직 초기부터 이광수가 귀국하는 1921년 2월 사이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으로 함께 활동한 이들이다. ‘도산안창호’는 "작사자 문제 발화”로, ‘안도산전서’는 "작사자 문제 유지, 확산”의 저술로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자 즉,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의 ‘安島山全書’의 평가 "작사자 문제 유지, 확산”의 평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주요한은 외견상으로는 몰라도 내심은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라고 보지 않았음을 읽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그 이유를 주요한의 발언을 순차화 하여 밝혀 보기로 한다.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주요한의 첫 발언은 네 가지 점에서 주목을 하게 된다. 하나는 작사자 문제가 발발한 후 첫 번째의 반응이란 점이다. 미국의 한 백과사전 출판사가 애국가 작사자의 연혁을 문의해 온 바, 공보처가 작사자를 안창호라고 통보하려 한다는 기사(서울신문)를 낸 것이 1955년 4월 4일 자이다. 그리고 주요한이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한 것이 4월 19일이기 때문이다. 둘은 안창호설에 대한 반론으로 대표적이란 점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안창호 작사설을 부인하는 것은 곧 윤치호를 작사자라고 반증하는 것임으로 쉽지 않은 처지이기 때문이다. 셋은 안창호의 최측근 중 한 명이란 점이다. 임시정부 시기와 흥사단 활동에서 이광수와 주요한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했던 인물인데, 한 사람은 작사자로, 또 한 사람은 이에 반론을 제기했다는 점에서다. 넷은 주요한은 애국가 작사자를 판단할 전문소양의 소유자라는 사실이다. 임시정부 독립신문 편집장 시절 ‘적십자의 노래’ 등을 작사하고 ‘불놀이’를 발표한 시인이란 점이다. 주요한의 첫 발언은 이렇다. 경향신문 1955년 4월 19일 자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라는 기고문에서 매우 강한 어조로 안창호 작사설을 부인한 것이다. "안도산이 지었다고 하는 것은 세간에 널리 유포되고 있는 설이지만은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신화적인 설이다. 도산이 작사자라고 하는 직접적인 증명을 가진 사람을 필자는 아직 만나지 못하였다. 또한 도산 자신의 입으로 그러한 말을 하는 것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신화적인 설’이란 표현은 곧 "안창호가 작사했다는 주장은 듣도보지도 못했다.”는 강경한 부인이다. 이 결과는 가장 가까이에서 살며 안창호가 직접 "내가 작사했다”라는 말을 한 바도 없다고도 했다. 이는 "내가 작사하지도 않았다고 하는 말도 듣지 못했다”라는 억지를 배척한다. 특히 안창호가 직접 자신이 작사자라는 말을 하는 것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말까지 하였다. 이는 이후 1963년 발간한 ‘안도산전서’에서도 "항간에서는 도산이 지었다고 믿는 이가 많으나~”로 기술하여 이를 견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의지적 표현은 주요한의 깊은 내심에서 나온 확신임으로 쉽게 변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두 번째 발언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 작사자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시기에 발표한 글에서다. 1955년 12월 조사위원회 일원으로서, 자신이 주관한 월간잡지 ‘새벽’에 발표한 ‘去國歌와 靑年學友會歌’란 글이다. 여기서 "그 委員會의 결론에 대해서 여기 言及하려는 것이 아니고~”라는 대목의 행간을 읽어보기로 한다. "文敎部에서 愛國歌作詞者調査委員會를 委囑하여 그 사무를 추진할 때에 筆者도 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었다. 그 委員會의 결론에 대해서 여기 言及하려는 것이 아니고, 調査途中에 딴 所得이 있기로 여기 披瀝하고자 하는 바이다.(중략) 그때 開城에 있는 韓英書院에서 찍어 내서 몰래 사용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거기는 약 2백餘篇의 唱歌가 수집되어 있는데, 推算年代로 보아서 물론 秘密出版이다. 이 唱歌集 속에 제1章은 愛國歌(동해물과 백두산이)로 되어 있고, 제2章 역시 愛國歌(성자신손 오백년은)로 되어 있다. 曲調는 두 가지가 같다고 하였고, 曲譜를 보면 스코틀랜드 民謠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의 그것이었다. 그 밖에 韓末에 유행되던 여러 가지 노래가 수집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筆者는 ‘靑年學友會歌’라는 것을 발견했다.(중략) 다음에 유명한 ‘去國歌’도 이 두 책에 揭載되어 있다. 이 歌詞는 春園선생이 저술한 ‘島山安昌浩’에 收錄되었으나 그 歌詞의 行數가 節을 따라 맞지 않는 점이 있어 一部 漏落된 것으로 추측되었는데 敍上의 兩 唱歌集에 收錄된 것으로서 완전한 歌詞가 발견되었다고 생각한다.”(월간 <새벽>, <去國歌와 靑年學友會歌>, 1955, 12) 다소 길게 인용한 글은 주요한이 ‘도산안창호’의 내용을 파악했을 뿐만 아니라 그 대비로 ‘한영서원 발행 창가집’도 조사자로서 살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첫 번째 발언 "신화적인 설”이라는 단언은 적어도 이광수의 ‘도산안창호’ 기록을 분명하게 부정한 것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이 두 번째 발언의 "그 委員會의 결론에 대해서 여기 言及하려는 것이 아니고~”라고 한 소이를 알 수 있게 된다. 즉, 이미 작사자조사위원회에서 적어도 안창호가 작사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음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한 것에 다름이 아니다. 또한 한영서원에서 발행한 창가집의 "제1章은 愛國歌(동해물과 백두산이)로 되어있고, 제2章 역시 愛國歌(성자신손 오백년은)”라고 구분하여 인용한 대목에서 굳이 밝히지 않은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한영서원의 창가집에는 두 애국가의 작사자로 윤치호라고 밝혀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작사자조사위원회가 결론을 윤치호로 내리게 한 근거 중 하나라는 것과 1916년 ‘경무부 보고 애국창가집 사건’ 기록에 ‘윤치호 舊作 애국가’라고 하였다는 사실에서다.(이후 1920년대 김종만 소장(所藏) 노래책에 애국가 작사자로 ‘윤선생 치호’로 표기되고, 가장 방대한 자료집인 1931년 한석원이 펴낸 ‘세계명작가곡집 무궁화’에 애국가 작사자를 ‘윤치호 작사’ 밝힌 사실에서 재확인이 된다.) 이를 주요한은 굳이 밝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주요한은 이 두 번째 발언의 행간에 "안창호는 작사자가 아니다”를 담은 것이다. 만일 작사자조사위원회의 결론이나 자신의 견해가 안창호가 작사자라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면 굳이 이상과 같은 표현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에 "그 委員會의 결론에 작사자는 안창호라고 했는데~”라고 했어야 마땅한 것이다. 결국 두 번째 발언에서도 주요한은 내심으로는 입장 변화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주요한의 저술 ‘安島山全書’에서 별도의 ‘愛國歌’라는 소항목을 두어 안창호 작사설을 확대, 재생산한 두 대목을 살피기로 한다. 먼저 살피는 것은 상해 임시정부 시절의 에피소드이다. 이의 진앙지는 이광수의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이다. 즉, "원래 이 노래의 시방 부르는 가사는 도산의 작이거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려서 국가를 대신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애국가는 선생이 지으셨다는데’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도 아니 하였다"”이다. 주목하는 것은 여기에서는 단순히 "대답이 없었다”인데 주요한은 다음과 같이 "웃고 대답이 없었다”라고 부연하였다. "항간에서는 도산이 지었다고 믿는 이가 많으나, 상해시대에 –이 노래는 선생님이 지으셨지요?-라고 도산에게 물으면 –웃고 대답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의 시점과 장소는 주요한이 임시정부 ’독립신문‘ 편집 등으로 안창호와 이광수와 함께한 상황이다. 그러므로 이 내용의 여부를 알 수 있는 사정이다. 이런 점에서 주요한의 부연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즉, "웃고 대답이 없었다”라고 하여 소위 ‘소이부답(笑而不答)’이란 에피소드로 만들었다. 이 사자성어는 굳이 말로 알려주지 않고 웃음으로 대신한다는 뜻이나 일반적으로는 직접 대답하기 곤란하여 회피하는 모습이나 대응할 가치가 없는 질문에 예의상 대처하는 태도를 말하기도 한다. 이에 적용하면 결국 안창호가 지었다고 믿는 이가 많지만, 정작 안창호에게 작사했느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하여 회피했다”인 것이다. 이 사정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내가 안창호와 함께 있었지만 들은 바가 없는 얘기이다.”라는 뜻을 피력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실상은 안창호 스스로가 작사자가 아니라고 말한 것과 같지 않느냐라고 한 것이기도 하다. 다음은 애국가를 대성학교 개교 후 안창호가 작사하고, 이를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발표하여 확산시켰다. 다소 감동적인 이야기다.(이를 장리욱은 1983년 발행한 <偉大한 韓國人 安昌浩>(중앙서관, 118~119쪽)에서 그대로 인용하여 확산시켜다.) 그러나 전후 맥락을 살핀다면 흔한 말로 ‘카더라 통신’ 수준인데, 에피소드의 시점 등을 눈여겨 읽지 않으면 그렇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이야기의 시점은 대성학교 개교 이후라는 점과 오늘날에는 쓰지 않는 ‘대리교장’ 같은 용어의 이해이다. 대성학교의 개교 시점은 1908년 9월이고, 대리교장 또는 대변교장은 저명 인사를 내세워 학생모집 효과를 얻기 위한 방편이고, 개교 후에는 윤치호가 서울에 거주하기 때문에 평양의 안창호가 교장직의 대리를 맡아 쓰게 된 말이다. "대성학교 대리교장으로 있던 도산이 하루는 서울에서 내려온 교장 윤치호를 보고 ‘성자신손 오백년은’으로 시작하는 애국가에서 -이 가사가 적당하지 아니하므로 고쳐서 부름이 좋겠으니, 교장께서 새로이 한 절을 지어 보시라-고 청했다. 이에 윤 교장은 -미처 좋은 생각이 아니 나니, 도산이 생각한 바가 있는가?- 하매 도산이 책상 서랍에서 미리 써 놓았던 것을 꺼내 보인 것이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되는 애국가 첫 절이었다. 윤치호는 즉석에서 그것이 매우 잘되었다고 칭찬하였고 도산은 -그러면 이것을 윤 교장이 지은 것으로 발표합시다-라고 하여 그 뒤부터 대성학교에서 새 가사로 부르게 되고 나중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해를 위해 다음과 같이 재구성하였다. 장소는 평양 대성학교 안창호 대리교장 사무실, 때는 1908년 9월 대성학교 개교 이후 어느 날, 등장인물은 서울에서 온 교장 윤치호와 평양의 대리교장 안창호, 개요는 안창호가 지어 두었던 "동해물과 백두산이~”하는 애국가를 서랍에서 꺼내 보이자 윤치호는 이를 좋다고 하자 안창호가 이를 윤치호가 지었다고 양보하여 발표하자고 하며 확산시켰다. 여기에 굳이 작품 이름을 추론한다면 ‘실패한 작사자 조작극’ 정도일 것이다. 매우 드라마틱하다. 안창호가 "윤 교장이 지은 것”으로 발표하여 명의(名義)를 넘겨주었다니 오늘이나 당시나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상황은 설정될 수 없는 것이어서 재미는 있으나 사실은 아니다. 결정적으로는 현 애국가가 ‘찬미가 14장’이란 이름으로 출판된 것이 1908년 6월인데도, 두 달이나 지난 뒤에 개교한 대성학교에서 가사를 두고 잘되었다고 하며 안창호가 작사한 것을 윤치호의 작사로 하여 발표하기로 하였다니 그렇다. 이런 이유로 주요한의 첫 발언에서 ‘신화적인 설’이라고 했다고 보는데, 이 극의 배경을 살피면 이 또한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할 것이다. 우선 작사자 문제의 발화점인 ‘도산 안창호’의 본질적 문제이다. 뒤에서 상술하겠지만 이 책 여러 곳의 탈맥락적인 안창호 작사 언급 대목은 편집과정에서 원 저자인 이광수의 의도와는 다르게 박현환(‘도산 안창호’의 저자가 이광수가 아닌 ‘편집 겸 발행인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대표이다. 박현환은 안창호가 귀국하자 1922년 7월 귀국하여 이광수 주변에서 흥사단 활동을 도운 인물이고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 복구 시기까지 국내 흥산단 업무를 관장한 인물이다.) 같은 인물이 가필한 결과라는 것이 문제다. 대표적인 대목이 ‘상해시대편’의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는 탈맥락적인 부분이다. 이에 따른 결론은 "전기소설에 근거한 안창호설은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두 번째 문제는 이 극의 대본이 ‘전문(傳聞)을 다시 전문’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주요한은 위의 인용문 앞에 이렇게 전재하여 알 수가 있다. "이에 대하여 안태국의 사위인 홍재형(洪在衡)이 장인에게 전해 들은 대로 기억하는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장인에게 전해 들은 대로 기억하는 바”에 의한 기술이라고 했다. 첫 발언자는 안태국, 이를 전한 이는 홍재형, 이를 듣고 주요한이 기록을 하였다. 첫 발화자 안태국(安泰國, 1877~1920)은 평양에서 나고 자란 인물로 대한제국시대 잠시 하급관리를 지냈다. 그리고 독립협회 평양지부에서 이강, 차리석, 최광옥, 이갑 등과 함께 활동하며 안창호와 연을 맺었다. 한일합방 후에는 계몽운동에 투신한 인물이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1916년에 만기 출감하였다. 3.1민족운동 이후에는 평양을 떠나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 내무총장 비서관직을 맡았다. 그리고 1920년 3월 병사했다. 이를 감안(勘案)한다면 이미 1920년 이전에 작사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 시기 이전에 사위 홍재형한테 전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1940년 상해 흥사단 원동지부 위원 정도로만 알려진 홍재형이 어떻게 장인에게 듣고 다시 이를 주요한에게 전했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1920년 이전 왜 이런 사실이 안태국만이 알고 있었느냐도 의문이다. 이런 점에서 ‘전언에 전언’을 통해 펼쳐진 대성학교를 무대로 한 ‘실패한 작사자 조작극’은 제목 그대로 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용, 살피려는 것은 임정시절 가사 일부를 수정하였다는 대목이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 11쪽에서 최남선이 언급한 부분이다. "만약 안창호가 문의를 하였다면 그 직위로 보면 주요한이 아닌 이광수에게 하였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가 있다. 주요한의 나이가 당시 20세라는 점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은 타당하다고 본다. 역시 ‘안도산전서’의 ‘애국가’ 항목(93~97쪽)에서 4절의 일부를 수정했다는 것과 2, 3절에 대한 언급 대목을 살피기로 한다. "1919년부터 상해에서 ‘임군을 섬기며’ 대신에 ‘충성을 다하여’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분명히 도산이 고친 것이었다. 둘째 절의 ‘남산 위의 저 소나무’라든지, 셋째 절 ‘가을하늘 공활한데’와 같은 웅장한 구상은 도산의 머리가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주요한, ‘안도산전서’, 1971년, 93~97쪽) 앞의 문장은 ‘찬미가 제14장’의 4절 중 ‘임군을 섬기며’를 현재의 ‘애국가’와 같이 ‘충성을 다하여’로 고친 것은 안창호라고 하였다. 이는 1919년 12월 1일 발행된 신한청년당 기관지 ‘新韓靑年’ 창간호 속 표지에 수록한 ‘애국가’ 4절에 ‘충성을 다하여’로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적어도 임시정부 시기 수정된 것으로 볼 때 가능성이 높다. 이는 주요한이 작사자에 대한 유일한 단정적 표현에서 그렇게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다음 문장의 해석 문제는 주요한의 표현대로 추정 정도일 뿐인 것이다. 이상에서 작사자 문제를 확산시킨 ‘안도산전서’의 세 대목을 그 발화점인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와 대비하여 살폈다. 이를 두 가지 관점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도산 안창호’의 원천적 문제 제기이다. 이 책은 이광수가 쓴 원고에다 당시 ‘편집 겸 발행인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대표 박현환(나정 박현환(蘿井 朴賢煥)은 1892년 평안북도 철산(鐵山) 출신으로 평안북도 정주 오산 학교의 이광수의 후배이면서 제자로 일본 유학 후 오산 학교 교사로 일했다. 3. 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안창호, 이광수, 주요한 등과 흥사단 원동 단우로 ‘신한청년’과 ‘독립신문’ 편집 업무를 함께 하였다. 해방 직후에 흥사단 국내 위원부 재건에 앞장섰고, 흥사단의 해외 조직과 국내 조직 재건에 기여한 인물이다.) 이 ‘태극기와 애국가’ 항목을 삭제하고, 대신에 곳곳에서 덧붙여 가필(加筆)을 하였다. 그 결과 감동적인 기술과 표현으로 독자들에게 사실로 오해하게 하였다. 소설가적 성향을 발휘한 것인데, 박현환은 이광수를 따른 작가로 1920년대 초반 톨스토이 소설 부활을 ‘해당화’라는 제명으로 번역하여 출간한 바 있다. 또한 해방 후에는 흥사단의 국내 재건을 도맡은 인물이다. 이로서 이광수에게 전기소설 집필을 의뢰하고, 이의 편집과 출판을 주관한 인물이다. 그 결과 탈맥락적이고 산발적으로 작사자가 안창호라고 왜곡시켰다. 사실(fact)이 아니라 감동으로 가짜 역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다음은 경향신문 1955년 4월 19일자의 첫 발언, 1955년 12월호 월간 ‘새벽’ 기고문, 그리고 1971년 주요한이 편찬한 ‘안도산전서’ 에서 제시한 애국가 안창호 작사설의 평가이다. 정리하면 주요한은 첫 발언 ‘신화적인 설’을 번복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안도산전서’는 흥사단의 입장을 고려하여 부정하지는 않고, 인용하는 방식으로 단순 서술을 한 것 뿐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주요한이 안창호설을 지지한 것으로 오독 할 수가 있다. 이는 위에서 살핀 바대로 주요한은 첫 발언 이후 이를 부인하거나 번복한 바가 없다. 결론적으로 주요한은 안창호가 작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단지 일부 사설을 수정한 바가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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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안창호 작사설’의 발화점1955년 5월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이하 조사자료) ‘안창호작사설’ 항목에는 2권의 책에서 인용한 것과 5인의 증언을 요약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 첫 번째 자료가 1947년 발행된 <도산안창호>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런 사실은 안창호의 애국가 작사설 발화지점은 위의 책에 있음을 알려준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우선 이 책이 발간된 1947년 이전에 안창호설이 제기 된 바가 없다는 사실과 이 책의 안창호설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었다는 사실에서다. 이 반론은 1948년 음악평론가 박은용(朴殷用)에 의해 안창호설은 잘못된 것으로 윤치호가 작사자라고 한 것이다. 이런 사실에서 안창호 작사설은 1947년 발행된 <도산안창호>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책의 어떤 대목이 결정적으로 문제가 된 것인지를 살피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안창호 작사설의 발화에서부터 확산 과정을 살피기로 한다. 문제의 <도산안창호>는 전기소설이다. 이 책의 예언(例言) 첫 줄에는 "건국 초를 당하야 도산의 전기와 언행록을 요구함”이 있어 집필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를 요구한 것은 판권에 기록된 ‘편집 겸 발행인’인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일 것이고, 실제 저자는 성명을 밝히지 않았지만 1953년 한글 3판에서 밝혔지만 "춘원선생의 붓으로 이뤄졌다”고 하여 처음으로 표지와 판권에 이광수를 표기했다. 주인공 안창호와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을 둘의 합작으로 혼동할 만큼 상해 임시정부 초기 가장 가까운 사이로 집필자로는 적격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책에는 애국가가 언급된 곳이 다섯 곳이다. 산발적인데다 탈맥락적이어서 의외이긴 한데, 이 중에 <조사자료>가 인용한 내용은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작사 배경이나 시기와 같은 것이 아니라 안창호는 애국가를 작사했음에도, 자신이 작사자라고 내세우지 않았다고 하는 내용이다. #1 "原來 이(애국가) 노래는 島山의 作이어니와 이 노래가 넗히 불려저서 국가를 대신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아니하였다. 云云” 이 내용의 원전인 <도산안창호>판권에는 ‘편집 겸 발행인’이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로 되어있어 이 인용 부분이 실제 이광수의 글인지, 아니면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일원(一員)인지는 의문이 든다. 어떻든 이 책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2 "原來 이 노래는 島山의 作이어니와 이 노래가 넗히 불려저서 국가를 대신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아니하였다. ‘愛國歌는 先生님이 지으셨다는 데’ 하고 물으면 島山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否認도 아니 하였다.” 이 부분이 초판과 재판 <도산안창호>의 원문이다. 바로 안창호설의 진원지이다. <조사자료>가 생략한 부분인 "愛國歌는 先生님이 지으셨다는 데 하고 물으면 島山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否認도 아니 하였다.”가 의미심장하다. 이후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난무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 내용은 진의를 모르는 일반 독자들에게는 안창호를 작사자로 믿게 하기에 충분했다. 시대적인 분위기상에서나 ‘민족 지도자’로 호명되는 안창호는 당연히 작사자가 되는 것에 이의가 없었다. 특히 읽을 거리가 많지 않던 해방직후 초판 1만부가 다 팔려 이듬해 11월에 재판을 발행했다는 정황에서 그 확산세는 대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안창호 관련 출판물에서는 당연히 이 내용은 인용되어 담론을 생산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출판물의 하나가 3년 후인 1950년 발행된『安昌浩雄辯全集』이다. #3 "상해계실 때에 학생들이 애국가를 선생이 지으셨다지요. 물으면 肯定도 不定도 아니 하시고 선생님은 웅변은 물론 음악을 좋아하시고~” 상해 임시정부 재직 시 평양에서 온 학생들이 작사자에 대해 물었지만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웅변과 음악을 좋아했다고 부연했다. 여기에서는 안창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것보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를 표현한 문장이 맥락적이지 못하지만 단순한 인용은 아니다. 말하자면 박은용이 안창호설에 대한 문제 제기에 대해 해명 또는 변명의 의미가 있는 듯하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서 살피는 인용 자료에서도 이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어 그렇게 본다. 5년이 지나 1955년 초에 제기된 글이다. #4 "愛國歌를 안 先生님께서 창작하였습니까? 고 仰問함에 對하여 先生은 아무 대답도 아니 하셨다. 아마도 謙遜의 뜻이라고 생각 된다.” 1955년 4월 1일자로 발행된「信仰生活」에 김인서(金麟瑞, 1894-1964) 목사가 쓴 <愛國歌의 作詞者>에서 인용하였다. 이 글이 같은 해 5월에 발행된 <조사자료> 보다 앞서고, 문제의 서울신문 기사 4월 4일자 보다도 앞선다는 점에서 국사편찬위원회의 작사자 조사 이전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 된다. 이 대목은『도산 안창호』나『安昌浩雄辯全集』의 작사자 대목이다. 그리고 "애국가 작사자 문제가 있다”라고도 하였다. 유일하게 안창호설을 부인한 것이다. 그리고 대답하지 않은 이유로 말한 ‘겸손’이란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극적으로 반론을 제기하였다. "만일 안 선생이 창작했다면 직언했을 것이다. 성일관(誠一貫)의 안 선생이 역사의 대(大) 문자(文字)에 대해 겸양의 침묵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작사자를 물었을 때 밝히지 않은 이유를 이어서 이렇게 주장했다."일제 압박 하에서 윤치호 선생을 애국가 작자라고 밝히지 못한 것은 그의 신변을 염려한 것이요, 일제 위력하에 무릎을 꿇고 있는 애국가 작자를 밝히면 애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도 윤씨작이란 기록을 볼 때 절의감(節義感)에 상처를 받았으나 역사는 고칠 수 없다.”안 선생이 말하지 않은 그만한 이유는 윤치호에게나 국민들에게나 상처(절의감)를 줄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매우 타당한 해석이다. 마지막으로 살피려는 것은 애국가 작사자 조사 초기 문제적 발언을 한 주요한의 기록이다. ‘문제적’이란 애국가 작사자 문제가 대두되자 "안도산이 지었다고 하는 것은 세간에 널리 유포되고 있는 설이지만은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신화적인 설이다. (중략) 도산 자신의 입으로 그러한 말을 하는 것도 들어 본 적이 없다”라는 발언을 말한다. 그런데 분명히 안창호 작사설을 부인하고 8년 뒤에 자신이 쓴 <安島山全書>에서는 이를 번복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에 주요한이 이렇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임시정부 초기 ‘애국가 수정안’ 논의 등이 있었던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은 주요한이 같은 책에서 되풀이하여 인용한 대목이다. #5 "항간에서는 도산이 지었다고 믿는 이가 많으나, 상해시대에 -이 노래는 선생님이 지으셨지요?-하고 도산에게 물으면, 웃고 대답이 없었다는 것이다.” #6 "도산에게 –애국가는 선생이 지으셨지요-하고 물으면 도산은 笑而不答하였다는 의미의 말이 있다.” 첫 발언과 달리 주어를 ‘항간에서는’이란 제3자로 하여 인용 차원에서 언급하였지만 두 번이나 반영한 사실은 <도산안창호>의 흥사단 입장을 고려한 듯하다. 소위 ‘笑以不答’ 대목으로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주요한으로서는 이 진의를 알고 있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의 단정적인 첫 반응에서 만일 이것이 과하게 표현하였다거나 오류였다면 15년만에 쓴 책에서 과오를 인정하거나 수정을 하였을 것이나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소이부답’에 대한 우리의 이해 배경은 중국 시인 이백(李白)의 ‘所以不答 心自閑’과 제갈양(諸葛亮)의 ‘諸葛之能 不可量’에서 묻는 이의 의도와 다른 대답은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경우의 응대이다. 그래서 "내가 짓지 않았다”의 표현인 것이 된다. 첫 발언에서 보다는 후퇴한 표현이지만 그 기조는 유지한 것으로 볼 수 있어 결국 주요한 역시 이 책에서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에 소이부답한 것이다. 이상에서 동일한 에피소드의 확산 과정을 살폈다. 3곳에서는 안창호설 지지(支持)로, 두 곳은 안창호설에 기울어서, 한 곳은 안창호설의 반증으로 재인용하였음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구체적으로는 5곳에서는 단순 반복 인용이나 한 곳, 즉 김린서 목사의 이용에서는 강력한 반론을 견인하는 인용이었다. 결국 이 에피소드에서 얻은 교훈은 두 가지가 된다. 하나는 일제하에서 윤치호의 신변을 염려하고, 애국가의 운명을 우려해서다. 둘은 김구선생이 1945년 <대한국애국가>에서 작사자 이름을 밝히지 않고 끝내 ‘일명(佚名)하였다’고 한 것과 같은 이유이다. 이 시대, 오늘에도 되새길만한 제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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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35)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문화강국의 조건은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한류와 K-컬처를 김구의 주문에 기대어 제대로 해석하는 것이 문화로 행복한 문화강국의 문을 열어젖히는 길일 것이다. 문화강국 얘기가 나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문화가 기반이 되고 돈이 되는 강한 나라라는 뜻으로 채택한 용어일 텐데, 비전이나 전략이 명료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지금껏 강국이라는 용어 앞에 붙였던 접두어만 해도 수십 종에 이르지 않겠나. 경제 강국, 글로벌 강국, 녹색 강국, 해양강국 등 균분할 수 없는 크고 작은 접두어를 남발해왔기 때문이다. 아마 김대중 정부시절 지식정보 강국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이래, 벤처 강국이니 문화콘텐츠 강국이니 따위의 용어로 확산한 것 아닌가 싶다. 노무현정부 때 문화강국 이야기가 회자되더니, 이명박정부 때 세계 속의 문화강국, 박근혜정부 때 창조경제와 문화융성 기반의 문화강국이란 용어를 사용해온 것 같다. 현재 중국에서 화두 삼고 있는 정치강국, 군사강국, 경제강국 등과 비슷한 취지일까? 문화강국이란 표어는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의 부록 '나의 소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화입국론 혹은 문화강국론이라 한다. 너무도 유명한 그의 언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백범일지'를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방식으로 윤문한 이가 춘원 이광수라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방민호는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와 이광수 '윤문'의 의미"(춘원연구학보, 2020. 4)에서, 이광수가 가필하거나 심지어 창작한 맥락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물론 춘원의 뜻이 가필되어 있을지라도, 문화 국력을 강조했던 백범의 포괄적 취지가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환기하고 싶은 것은 여기서 예시했던 문화의 힘, 다시 말해 문화강국의 조건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한류와 K-컬처, 문화강국의 위상 한류(韓流/Korean Wave)는 한국의 대중문화가 외국에서 유행하는 현상이라 뜻이다. '한국문화의 물결'이다. 1999년 문화관광부에서 대중음악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한류-Song from Korea>가 최초라 한다. 하지만 대중음악보다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전역에 출렁였던 물결은 한국 드라마였다. 나도 1990년대 말기부터 아시아의 오지 답사를 많이 다녔는데, 중국 일본을 넘어 심지어 동남아시아 시골구석에서도 작은 TV에 코를 박고 한류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드라마와 영화는 물론, K-KOP으로 호명되는 대중음악, 게임, 음식, 관광, 패션, 화장품, 디지털 분야 등에 광범위하게 걸쳐있다. 최근에는 '강남스타일'에서부터 BTS의 빌보드 석권, 영화 오징어게임 등으로 세계 무대의 정점을 찍고 있다. 하지만 수많은 분석이 행해지고 있으나 그 이유를 온전하게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K-컬처라는 호명의 범주를 넘어서는 현상이나 개념들에 대해 어떻게 논의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문화강국'이 각 장르의 접두어를 '강국' 앞에 붙이는 방식이라면, 'K-컬처'는 K-헤리티지 K반도체전략 등 접미어를 붙이는 방식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것의 기반이 되는 전통문화다. 2021년 9월 한 달 동안 문체부가 우리나라 등 세계 24개국 만2천500명을 대상으로 행한 온라인 조사에 의하면, 한국에 대한 관심을 묻는 8개 문항 가운데 가장 응답을 많이 받은 항목이 '한국 전통문화 체험 희망(83.4%)이었다. 그래서다. 전통문화 기반의 문화강국이라는 위상은 무엇일까? 오징어게임과 자살공화국의 함수 K-컬처 물결 중에서 이즈음 가장 뜨거운 종목이 영화 오징어게임이다. 문화란에는 천편일률 오징어게임의 성과를 찬양하거나 그 이익의 분배 이야기가 도배된다. 심지어 국가 문화정책의 중요한 설계에 인용되기도 하고 기저(뿌리)로 삼기도 한다. 관련한 지원이나 교육, 이익분담 시스템의 재구성 논의가 그것이다. 이 방향이 옳은 것일까? 2021년 말 BBC 뉴스에 '오징어게임에 드러난 한국의 현실'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넷플릭스 사상 최고 인기 콘텐츠가 된 오징어게임이 사실은 한국사회의 복잡성에 대한 통찰력을 100여 개 외부 나라에 알렸다는 것이 요지다. 여성 혐오와 빈곤, 이주노동자와 탈북자, 정경유착 비리 및 한중관계 등이 거론되었다. 지금의 정치 지형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혐오와 배제, 극단과 척결, 마치 오징어게임의 생존투쟁을 닮았다. 아니, 한국의 현실을 오징어게임이 대변해준 것 아닌가. BTS와 오징어게임의 그늘을 주목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 20여 년간 OECD 자살률 부동의 1위다. 잠시 상위에서 밀려나는 듯하지만 20대 여성 10대 남성의 자살률은 오히려 가파르다. KOSIS에서 내놓는 통계를 보면 참담할 지경이다. 방송들이 앞다투어 심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수많은 분석이 쏟아져 나오지만 자살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찌 오징어게임을 한국의 현실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혐과 이대남, 페미와 남혐이라는 혐오방식, 정적을 척결해야 하는 극단주의적 정치, 일등 아니면 모두 죽임당하는 게임방식이, 지난 1세기 아니 수천 세기 이름도 빛도 없는 민중들이 피 흘리고 땀 흘려 만든 이 나라의 결과물이란 말인가? 호혜와 공생, 연대의 대동 세상을 꿈꾸고 가꾸어 온 수많은 생각과 방식들, 내 방식대로 말하면 법고창신의 토대가 되는 전통문화는 어디로 가버렸는가? 영화의 내용이 단지 비극이라는 문학의 장치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통절한 현실비판 앞에 그럴 수가 없다. 하지만 요한호이징하가 말했던 호모루덴스 곧 유희하는 인간의 본질이 극단의 일등주의를 뜻하는 게 아니라는 것만큼은 환기하고 싶다. 그가 종교와 전쟁마저 놀이의 범주에 포괄했던 것은, 게임이라는 경쟁으로 호혜 상생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인간(人間)이란 말 자체가 네트워크의 존재라는 뜻 아닌가. 궈차오(國潮)강국론과 한류 문화강국론 이즈음 새로 생긴 조어로 중국의 궈차오(國潮)가 있다. 한류와는 다르게 자국 중심소비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인들의 소비 능력이 향상되는 과정에서 내수시장 마케팅에 성공한 사례다. 이 안에는 문화제국주의, 문화강대국이라는 함의가 들어 있다. 한류와 궈차오, 상반된 듯한 두 물결을 주목한다. 군사강국, 경제강국 등 국력이 강하다는 뜻의 문화강대국일까. 아니면 국제사회에서 그 세력을 인정하는 나라라는 뜻의 문화강국일까. 예컨대 군사력이 강한 러시아와 그 반대인 우크라이나 중 어디가 문화강국일까? 자발적인 내수경제 강제와 자국상품에 대한 애호의 경계는 어디쯤일까? 그래서다. 중국의 궈차오는 한류와 문화강국이라는 표어를 콘텐츠 강국이나 수출 위주 문화정책의 기저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거울이다. 오징어게임의 성과는 성과대로 민간의 자율에 맡기고 자살률 극복부터 설계하는 것이 진정한 문화강국의 정책이라는 반면교사이지 않을까? 며칠 후 대통령선거가 있다. 극단적 혐오와 배제를 앞세우고 국민을 갈라치는 극단끼리의 공생방식은 이제 그쳐야 한다. "세계 인류가 네오 내오 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오, 인류의 최고요, 최후인 희망이요, 이상이다(중략). 완전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김구가 말한 '나의 소원'이자 문화강국의 조건이다. 지난 1세기 피와 땀으로 재건한 나라, 한류와 K-컬처를 김구의 주문에 기대어 제대로 해석하는 것이 문화로 행복한 문화강국의 문을 열어젖히는 길일 것이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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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립국악단, 새봄 맞이 신춘음악회 '산책'청주시립국악단은 오는 3월 7일 저녁 7시 30분 청주예술의전당 대공연장에서 제135회 정기연주회 신춘음악회 '산책' 공연을 연다고 밝혔다.이번 공연은 청주시립국악단의 올해 첫 연주회다. 겨우내 움츠려있던 몸과 마음에 기운을 불어넣고 활기찬 새봄을 맞이하기 위한 무대를 기획했다.비나리 명인 이광수와 (사)민족음악원(이사장 이광수)이 꾸미는 '비나리'로 문을 연다. 여러 액살을 물리치고 모든 일이 잘 되기를 기원하는 축원과 덕담 등의 내용을 담고 있어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에게 앞날의 행복과 안녕을 바라는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다음은 대중에게 익숙한 경기민요 천안삼거리를 소재로 한 천안삼거리 주제에 의한 관현악 '흥'(작곡 강솔잎)을 선보인다. 이어지는 무대는 배우 양금석의 민요 메들리다. 양금석은 경기민요 이수자로 연예계 대표 소리꾼이다. 다수의 국악 연주회 협연과 세 번의 개인 연주회를 열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최근 TV프로그램 MBN 보이스트롯에 출연해 민요와 트로트를 결합한 곡을 깊은 목소리와 풍부한 감정으로 표현해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다.이어서 소프라노 박혜림(청주시립합창단)과 바리톤 양진원(청주시립합창단)의 협연 무대가 꾸며져 아름다운 소리로 더욱 풍성한 무대를 만들고, 박범훈 곡의 사물놀이 협주곡 '신모듬'을 이광수와 (사)민족음악원이 꾸미며 공연의 대미를 장식한다.김원선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는 "우리 소리의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따뜻한 봄의 기운을 담아가실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으니 시민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응원 바란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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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 윤치호 인정애국가에 대한 접근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기원 또는 명칭일 수도 있고, 형태나 내용에 대한 접근이 있을 수 있다. 특히 노래라는 점에서 전통성이나 전수 현상이 중요한 과제일 수 있다. 그런데 애국가에는 이런 과제와는 달리 의외적으로 우리 현대사와 관련하여 배태된 작사자 문제가 걸려있다. 이는 역경의 근대사를 함께한 애국가의 숙명이기도 하다. 보편적인 노래의 유통과 전승이 아닌 익명성과 의례성으로 전승된 특성으로 하여 작사자 여하(如何)는 중요한 과제로 오른 것이다. 이 때문에 국가 기관인 문교부 산하 국사편찬위원회가 이를 규명하기 위해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1년 반이란 기간을 갖고 조사를 한 바 있다. 그 결과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그런데 한국전쟁 복구 중이 1956년 ‘국론분열을 우려하여’라는 정치적 이유로 이를 국가에서 공식화 하지도, 법제화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잠복되었던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 문제는 90년대 들어 재론이 되었다. 1998년 정부수립 50주년, 국가상징연구회 창립5주년을 기념한 세미나 ‘國歌 愛國歌에 대한 再檢討’이다. 그리고 2017년 6월 한국 프레스센타에서 개최한 흥사단 주최 ‘애국가 작사자 규명 학술심포지엄’에서 김연갑이 발표한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이다’에서 학술적으로는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확정받았다. 그동안 반대론자들이 제기한 ‘譯述’의 해석 문제, 가사지의 ‘1907年 윤치호作’에 대한 오해, 이광수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오류 등을 해결하였음은 물론, 다음 세 가지 핵심 문제를 해결하였기 때문이다.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①독립신문 서재필 기록을 통한 ‘무궁화노래’의 윤치호 작사 확인 ②중앙대학교 안춘근(순흥 안씨)교수 발표 1904, 5년 필사 자료 3편의 위작 판명 ③국사편찬위원회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 3차 회의 결과 ‘윤치호 작사 확인’ 등의 성과를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함에도 일부 흥산단과 좌파계열의 진영논리로 윤치호 자사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를 온전하게 인정하게 하는 데는 우선 윤치호 작사 사실에 대한 더 면밀하고 자료와 해설로 설득을 기울여야 한다. 이 글 역시 이런 의도에서 그동안 작사자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자료임에도 전체적인 조명이 도외시된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를 재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조사위원회가 결성되기까지 얼마나 혼란이 격심했고, 그것의 해소가 얼마나 난문제였는가를 확인할 수가 있다. 길을 잃었을 때 길을 잃은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찾아야 한다는 사실에서 되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 것은 ‘조사자료집’이지 ‘조사결과보고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부연하면 국사편찬위원회가 조사를 위하여 사전에 기본 자료를 취합하여 위원회 위원들에게 제공한 것이지, 조사 결과를 수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조사자료 중에 "내용이 현행 애국가와 동일한 者의 有無如何는 未詳임”(1쪽)이란 표현 등을 오해하여 "조사자료에 작사자 미상이라고 하였다”는 등의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는 제1쪽의 서문격의 글, ‘애국가화창 사례’, ‘애국가의 종류’, ‘작사설의 종류’, ‘부록’으로 구성되었다. 총 54쪽의 프린트본(가리방)이다. 목차는 없고 1쪽부터 본 내용이다. 서문에서는 작사자 거론 5인을 적시하고 세 가지 설(說)을 제시하였다. 내용의 첫 문장은 "現行愛國歌作詞者로 論義 되고 있는 인물로는 尹致昊 安昌浩 崔炳憲 金仁湜 및 閔泳渙의 五人이고 또한 單獨作詞說, 合作說 및 改作說이 있다.”고 하였다. 합작설은 최병헌과 윤치호의 합작설이고, 개작설은 민영환의 작사를 김인식이 개작하였고, 그 후 안창호가 또다시 개작했다는 설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개작설을 제기했데, 주요한과 이광수의 주장으로 상해임시정부 시기에 안창호가 개작하였다는 설이다. 이때 거론된 인물은 5인이고, 이들 대상의 단독작사설, 합작설, 개작설 세 가지가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애국가 화창(和唱) 사례 문헌과 신문 소재 애국가 기록을 3쪽에 걸쳐 인용하였다. 증보문헌비고 ‘악고’편에 광무4년 군악대가 애국가를 연주했다고 한 기록을 인용하였다. 한국법전 제2장 ‘의식’편에 1908년 애국가를 연주했다는 기록을 인용하였다. 신문으로는 대한매일신보와 그리스도신문(2회 인용)에 애국가와 황실가를 화창 또는 제창했다는 기록을 인용하였다. 전자는 8회, 후자는 2회 인용하였다. 문헌과 증언이 뒤석여 있다. 애국가의 종류 "애국가의 종류가 많았던 모양으로”라며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서북학회보를 인용하고, 김양선 목사와 장지영과 최남선의 증언을 수록했다. 애국가와 무궁화가와 국가 세 종류를 제시했다. 특히 1902년 학부(學部) 제정 에케르트 작곡 ‘대한제국애국가’와 관련한 기록과 위의 세 분의 증언을 통해 그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가사 일부도 제시했다. 시선을 모으는 것은 이를 ‘애국가’가 아닌 ‘國歌’로 명기했다는 점이다. 이는 문제의 현행 애국가를 ‘국가’는 이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있었음을 알게 한다. 작사설 서론에서 밝힌 5인에 관련한 작사설을 1955년 5월 13일 이전까지의 신문 기사와 증언 등을 분류하여 제시하였다. 민영환(2/1쪽), 안창호작사설(3쪽), 김인식작사설(1쪽), 최병헌작사설(1쪽), 윤치호작사설(6쪽) 순으로 관련설을 취합하였다. 윤치호 항목은 가장 많은 내용을 담았다. 이 윤치호설은 앞의 4인에서 제기한 설과 교차 검증을 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여 관심을 갖게 된다. 이 항목에 대해서는 다시 집중 분석을 하기로 한다. 부록 증보문헌비고와 한국법전 수록 애국가 기록과 독립신문 투고로 게재된 애국가 18편, 대한메일신보 잡보란 수록 무궁화가 2편과 애국가 수록되었다. 그리고 황성신문 ‘國歌調音’ 기사와 ‘대한제국애국가’ 가사를 수록했다, 단행본으로는 ‘한영서원 발행 프린트본 창가책 인용 애국가를 수록하고 백종섭씨 소장 창가책에서 애국가(찬미가 제1장), 현 애국가 가사를 인용하였다. 한편 서북학회보 ‘西友’에서 "학부에서는 애국가 통일 위원을 선정하였는데 위원 중에는 학부협판 윤치호의 이름도 있다.”를 인용하였다. 참고문헌 목록 21종의 참고문헌을 기록했다. 완조실록(王朝實錄-고종·순종 실기와 승정원 비서원, 규장각일기), 관보, 공사관기록, 독립신문 외 4종, 한국통사, 대한자강회보 외 2종 유년필독(幼年必讀 왜정시대 압수 책) 그리고 조선고가요집(朝鮮古歌謠集 손진태 편)이다. 의외인 것은 무가(巫歌)를 모은 ‘조선고가요집’이다. 이 시기 애국가를 수록한 해방 직후 발행의 노래책이 10여 종에 이르는데도, 이 같은 관계가 없는 무가집을 참고자료로 포함시켰다는 것은 위원회의 무성의함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는 5인에 대한 설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수집된 자료들을 5개 항목으로 정리했다. 이 중에 작사설 항목은 이 자료집의 핵심 주제로 구체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민영환부터 윤치호 작사설까지 살피기로 한다. 1. 민영환 작사설 민영환(閔泳煥, 1861~1905) 작사설은 두 사람의 증언에서 제기되었다. 장도빈(1888~1963)과 김동욱의 증언인데, 전자는 역사학자로 서울신문 1955년 4월 16일 자에 밝힌 내용이다. "거금 47, 8년 전 학생시대에 이미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를 불렀다. 민영환 작이라고 들었다.”고 하였다. 1908년에 들었다고 하였다. 이 증언은 부정확하다. 현 애국가가 1907년에 작사되었기에 들었던 시기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민영환 작사로 거론된 것은 1902년 학부에서 제정한 ‘대한제국애국가’이다. 그러므로 장도빈은 현 애국가와 ‘대한제국애국가’를 혼동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증언도 하였다. "당시에 안창호작 애국가를 여러 번 들은 일이 있는데 현행 애국가는 아니었다”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안창호작’이 명확히 제시되지 않아 ‘거국가’인지 아니면 1908년 2월호 태극학보 ‘愛國生’이란 필명으로 발표한 ‘찬 愛國歌’인지, 또 아니면 신한민보 1910년 10월 12일 자 기사 ‘大韓魂’에 포함된 ‘애국가’인지 불분명하다. 다만 안창호 작사 애국가가 있을 수 있음을 유념하게 하는 동시에 현 애국가는 아니라는 사실도 확인해 준 것이다. 김동욱의 증언은 출전이 없다. 조사자료를 꾸미는 과정에서 취합한 증언인듯하다. 당시 86세로 "기미년에 윤치호씨와 더불어 애국가를 불렀다. 그러나 애국가 작사자는 민영환에 틀림없다”(8쪽)라고 하였다. 이 증언 역시 1902년 작곡된 ‘대한제국애국가’와 혼동한 듯하다. 이런 오해의 배경은 이 애국가 악보 서문에 "大師府會計局總長陸軍副將 正一品勳一等 閔泳煥”으로 되어있기 때문인 듯하다. 2. 안창호 작사설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작사설은 매우 관심을 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작사자 조사를 하게 한 원인 제공자이기 때문이다. 먼저 두 가지 출전이 제시되었다. ‘도산안창호’(1947. 5 30 刊)와 ‘도산안창호웅변전집’(1950 5 20 刊)으로, 여기에서 네 단락을 인용하였다. ①"도산이 상해 임정시대에 현행 애국가 가사 중 ‘임금을 섬기며’ 부분을 ‘충성을 다하야’로 修正하였다.” ②"원래 이 노래는 도산의 作이어니와 이 노래가 넓리 불려져서 국가를 代身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自己의 作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云云” ③"애국가는 선생님이 지으셨다고 하는데 하고 물으면 도산은 對答이 없었다. 그러나 否認도 하지 않았다. 云云” ④"도산이 지은 노래는 여러 十篇이 있거니와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가 가장 잘 된 作品이라 云云” 이상의 네 가지 주장은 모두 1947년 중반에 발행된 이광수가의 전기소설 <도산안창호>에 배경을 두고 있다. 이것이 안창호설의 한계이기도 한데, 관련 자료들 간의 교차 검증을 하면 다음과 같다. ①은 ‘신한청년’ 창간호에 게재된 애국가 4절에 ‘충성을 다하여’로 수정되어 나오니, 이를 안창호가 수정했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 단 수정 시점이 창간호 발행 시점인 1919년 12월 이전이라는 단서가 충족되어야 한다. ②와 ③은 같은 맥락의 증언이다. 이 문제는 안창호가 언제 작사했는가와 왜 자신이 작사했으면서 이 사실을 숨겨야 하느냐 라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제기된 안창호 작사 시기는 1908년 9월 26일 대성학교 개교 이후 윤치호 교장에게 안창호가 지은 것을 보여주고 후렴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양해를 얻어 발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은 윤치호가 애국가(찬미가 제14장)를 1908년 6월 25일 발행한 역술 <찬미가>에 수록한 이후라는 문제가 확인된다. 여기에다 "왜 자신이 작사했다는 사실을 숨겨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명료하게 답하지 못하는 문제도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안창호의 겸양 때문이다” 또는 "윤치호의 명성을 이용하여 널리 전파시키려는 의도에서다”라는 등의 말이 있기도 했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미 반론이 있는 상태이다. 그 하나가 조사보고서가 나오기 직전인 1955년 4월호 ‘신앙생활’에 밝힌 김인서(金麟瑞, 1894~1964) 목사의 강력한 반론이다. "만일 안 선생이 창작했다면 직언했을 것이다. 성일관(誠一貫)의 안 선생이 역사의 대(大) 문자(文字)에 대해 겸양의 침묵이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왜 원작자를 밝히지 아니했을까? 일제 압박 하에서 윤선생(윤치호)을 애국가 작자라고 밝히지 못한 것은 그의 신변을 염려한 것이요, 일제 위력 하에 무릎을 꿇고 있는 애국가 작자를 밝히면 애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도산 안창호>의 내용에 대해서는 조사자료에서도 제기되었다. 그것은 이광수의 두 번째 부인 허연숙(許英肅, 1897~1975)이 1955년 4월 20일 자 자유신문에 증언한 것으로, 윤치호의 딸이 이에 대해 問議해와 이광수가 설명하여 해득시켜 보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와는 상반된 증언이 있다. 윤치호 작사설 자료에 수록된 주영환(朱榮煥)의 서면 증언이다. "이광수의 도산전기에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 씨라 한 것은 이광수의 실책이다. 출판 후 춘원은 안영자 씨를 통하야 訂正할 기회를 만들기로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광수는 반민족행위특별법에 의한 처벌을 받는 등 수난을 당하다 6,25 전쟁 혼란 와중에 납북을 당했다. 이런 상황임으로 ‘도산안창호’의 내용을 수정할 수 없는 처지를 말한 것이다. 이로서 안창호의 가장 중요한 증언은 윤치호 딸의 오류에 대한 항의가 있었다는 사실로 증거력이 상쇄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가족이나 친지의 증언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이어서 반드시 교차 검증을 거쳐야 한다. 안창호 측은 허영숙의 증언만을 거론하나 이 같은 대비로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전기소설과 관련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아주 근원적인 문제인데, 앞장 ‘도산 안창호’의 해악(害惡)‘에서 밝혔듯이 이 ‘도산 안창호’는 애국가와 관련해서는 이미 문헌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상태라는 점이다. 되풀이하지만 이광수의 글이라면 이렇게 파편적이고 탈맥락적일 수가 없는 데다 ‘살아있는 태극기와 애국가’라는 소제목의 글에서 이 내용이 생략된 사실에서와 같이 편집과정에서 가필과 삭제가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어서 주요한(朱曜翰, 1900~1979)의 중장이 있다. 조사자료에는 두 가지 증언을 수록했다. 경향신문 1955년 4월 19일 자 기고문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에서 제기한 것을 인용한 것인데, 하나는 상해에서 안창호가 ‘임금을 섬기세’를 ‘충성을 다하여’로 改作을 하였을 때 자신에게 問議(9쪽)하였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주장에 대해 같은 조사자료 같은 항목에서 최남선이 "만약 안창호가 문의를 하였다면 그 직위로 보면 이광수에게 하였을 것”(11쪽)이라고 지적을 하였다. 이는 주요한의 나이가 20세라는 점으로 보아 최남선의 지적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는 대성학교 교원이었던 김동원(金東元)으로부터 들었다는 말이다. 그 내용은 대성학교 시절 안창호가 윤치호의 ‘성자신손’(무궁화노래)을 ‘동해물과 백두산이’(애국가)로 개작하였다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선 여러 편의 글에서 밝혔듯이 대성학교가 개교하기 이전에 윤치호는 역술 <찬미가>에 수록, 발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함에서 이런 주장은 원천적으로 무시될 수밖에 없는 낭설인 것이다. 다음은 최일봉(崔日鳳)이 서면(書面)으로 제출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하나는 자신이 의주 강연에서 안창호가 자기가 지었다는 "애국가를 배워주었다 云云”이라고 한 부분이다. 또 하나는 같은 맥락의 주장으로 안창호가 임정시절 내무총장 비서실에서 "이유필(李裕弼) 입회하에 안창호 선생은 애국가는 내가 창작자야 하고 언명하였다. 云云”한 것이다. 전자는 자신의 경험이나 이의 진정성은 의문이 된다. 그리고 후자는 안창호설의 상투적인 주장이라 위의 김인서 목사 주장으로 답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허영숙 씨의 증언을 살핀다. 두 가지를 인용했다. 하나는 ‘도산안창호’의 내용에 대해 윤치호 측에서 이광수에게 문제를 제기했으나 해득하고 돌아갔다는 것과 자신이 진명학교 시절 김인식으로부터 음악을 배웠다고 하며 "도산이 作詞하야 愛蘭 민요곡을 부쳐서 부르다가 김인식 씨가 음악가로서 名聲이 있었으므로 作曲을 부탁했던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전자는 앞에서 교차 검증을 통해 살핀 바와 같고, 후자는 문맥상 애매하여 논의 할 필요를 갖지 못하나 김인식설의 배경 정도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3. 김인식 작사설 음악교육가 김인식(金仁湜, 1885~1963)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작사자를 조사하게 되었을 때 크게 관심을 둔 인물이다. 직접 직원이 방문하여 증언을 청취하기도 했고, 음악평론가 이상만(李相萬, 1935~)이 방문하여 인터뷰를 하기도 하였다. 이런 관심을 끌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점에서 인데, 하나는 1907년을 전후한 시기 여러 학교와 기관에서 지도한 음악가이고, 둘은 1955년 당시 작사설 거론자 중 유일한 생존자라는 점에서다. 그의 활동은 우리나라 근대음악사의 초기 상황에서 종횡한 음악가이다. 김인식은 1896년 감리교에서 경영하던 평양 숭덕학교(崇德學校)에 입학하고, 그 뒤 숭실중학교에 진학하여 선교사 부인인 헌트(Hunt)와 정의여학교(正義女學校) 교장 스눅(Snook)에게서 성악·오르간·악전을 배웠다. 이후 바이올린과 코넷까지 배웠는데, 오르간 연주는 뛰어나 숭실중학 3학년 때 1학년 음악수업을 맡을 정도였다. 1907년 미국 유학 준비차 상경하였다. 그런데 서울의 여러 사립학교에서 음악지도를 요청받고 교사로 활약하게 되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부설 상동청년학원 중학부에서 서양음악을 지도하는 한편, 진명(進明)·오성(五星)·경신(儆新)·배재(培材) 등 여러 사립학교에서도 서양음악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합창단인 경성합창단(京城合唱團)을 종교교회(宗橋敎會)에 적을 두고 활동하였다. 이런 활동상에서 애국가 작사설의 인물로 시선을 끌만 하였다. 조사자료에는 1908년에 진명여학교 창립기념에 쓰기 위해 ‘애국가’란 제목으로 작사를 하였다는 주장을 하였고, 이에 대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세브란스의전에 다니던 박서양(경성합창단 단원)이란 학생이 부르는 ‘성자신손~ 운운’하는 "皇室歌(作者不明)를 듣고 이것에서 힌트를 얻어 작사·작곡을 하여 기념식에서 불렀고, 그 후 기호학교에서도 가리쳤다.”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7년 후에 작고하였음에도 작사자로 제외가 되었다. 이에 대한 사정과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미 필자가 1998년 발간한 <애국가 작사자 연구>에서 상술하였지만,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1907년을 전후한 당시 윤치호와는 YMCA 활동과 한영서원 하기 음악강습 교사 활동, 그리고 종교교회와의 관련에서 윤치호 역술 <찬미가> 제14장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었다는 점. 둘째, 1910년 경신학교 교사 재직 시 <보중친목회회보> 창간호에 발표한 <애국가>가 무궁화가 가사에 자신이 작사한 것을 더하여 ‘올드랭 사인’곡으로 발표하며 ‘김인식 작사’로 한 바가 있다. 이것이 현 애국가가 아니라는 점. 셋째, 이 같은 사실을 생존 시에 밝히지 않았다는 점. 넷째, 작사자조사위원회의 출석 증언 요청을 거부하였다는 점. 마지막은 남긴 일기에 "찬송가에 손을 얹고 작사하였다”라고 하였지만, 그 일기를 쓴 일자가 작사자 조사 직후라는 점 등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외 김인식설에는 김한규 고유상 홍만유, 그리고 당시 진명여학교 학생 3인의 증언도 있다. 이는 모두 ‘김인식 작사’에 대한 오해의 결과이고, 김인식 작사의 다른 작품들과의 혼동에서 결과한 것이다. 한편 증언자 중 출판인 회동서관(淮東書館) 사장 고유상(高裕相)이 관심을 끌지만, "김인식 작 창가책 소형이 있었다”는 단순한 증언일 뿐이었다. 실제 김인식 명의의 악보집과 창가책과 악전(樂典)이 있지만 거기에 애국가는 들어있지 않았다. 여기서 김인식 작사로 발표된 애국가(KOREA)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애국가>(KOREA)는 8·6조 시형에 곡조는 ‘올드 랭 사인’이다. 이는 현 애국가와 같은데, 노랫말을 의외로 두 부분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一 華麗江山東半島는 우리本國이오 稟質됴흔檀君子孫 우리國民일셰 無窮花三千里 華麗江 大韓사람大韓으로 길이 保全하셰(후렴) 二 愛國하는 義氣熱誠 白頭山과 갓고 忠君하는 一片丹心 東海갓치깁다 三 二千萬人오직한마암 나라사랑하야 士農工商貴賤업시 職分을다하셰 四 우리나라우리皇上 皇天이도으샤 萬民同樂萬萬歲에 泰平獨立하셰 총 4절에서 1, 2절은 김인식 작사이고, 3, 4절은 윤치호 작사 ‘무궁화가’의 3, 4절이다. 이 1, 2절을 언제 작사하여 재구성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쳤는지는 모르지만 윤치호가 ‘찬미가 제14장’(현 애국가)을 작사한 1907년 중반 이전이라고 보게 된다. 이는 다시 밝히겠지만 화가 김은호의 회고록 ‘書畫百年’에 윤치호 작사 증언 부분에서 김인식이 등장하는 대목이 있어 추정이 된다. 그런데 이 <애국가>는 일제강점기를 거처 해방에 이르기까지 전승된 것이 확인된다. ‘예술통신’ 1947년 2월 10일 자 ‘愛國歌 其二’로 나오는 것은 물론 몇몇 필사본에도 수록되어 전해지는 것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정황에서 확인하듯이 김인식은 당시 애국가 작사자 규명에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결정적 인물이었다. 분명하게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궁화가’에다 가사를 더해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우를 범하는 바람에 이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증언을 거부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음악가로서, 생존 인물로서 역사적 소명을 다하지 못하였다. 이는 애국가 작사자 문제에서 가장 안타까운 장면이기도 하다. 4. 최병헌 작사설 최병헌(崔炳憲, 1858~1927)은 애국가의 본문은 최병헌의 ‘불변가’에서, 후렴구는 윤치호의 '황실가'(무궁화가)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소위 ‘윤치호·최병헌 공동작사설’의 인물이다.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 최병헌 항목에는 최황(崔晃) 등 가족 2인의 명의로 제출한 자료가 요약되어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1905, 6년 경 정동 자택에서 남산을 바라보고 작사했다. ②윤치호와는 독립협회 때부터 친교, ‘황실가’ 후렴을 빌려 ‘하나님이 보호하사’ 애국가를 작사했다. ③윤치호는 기독교인이 아님으로 이런 표현을 쓸 수가 없다. ④윤치호는 최병헌의 권유(勸誘)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작고 28년 후의 후손들이 제출한 자료이니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③과 ④같은 내용은 어불성설이다. 윤치호는 최초의 감리교 세례교인으로 최병헌 보다 입교가 12년이 앞선다. 최남선이 이를 교정시켜 주었다. 윤치호가 독립협회 회장 시기 최병헌은 주사직에 있었다. 가족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술한지를 알 수 있다. 이를 견준다면 앞의 두 가지도 신뢰하기가 쉽지 않다. 신흥우(申興雨, 1883~1959)의 증언도 있다. 12세 때 배재학당(培材學堂)에 들어가 신학문을 익히면서 개화사상과 기독교와 서구 문물을 접했다. 1896년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등의 개화 청년들이 조직한 협성회(協成會) 청년부에 가담하여 계몽 운동을 벌였다.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에도 소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이후 위의 인물들과 정치 토론을 벌이며 근대화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러나 불량한 학생으로 오해를 받아 대한제국 정부의 감시를 당하기도 했다. 영어 실력이 출중하여 1903년 선교사를 통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유학한 뒤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정치학과 법률학을 공부했다. 1911년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1년 만인 1912년 식민지 현실에 분개하여 다시 망명을 하려 했다. 이에 윤치호의 권고로 망명을 단념하고, YMCA 이사가 되고, 배재학당 교장을 맡았다. 이상과 같은 이력에서 작사자에 대한 코멘트를 할 만한 동시대 지식인임은 분명하다. 조사자료에는 자신이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정초식에 14세로 참가하여 ‘독립가’와 ‘진보가’를 불렀다고 하였으며, 작사자에 대해 이런 증언을 하였다. "1903년부터 1911년까지 滯美 中에는 안창호작이라 들었고, 귀국 후에는 윤치호 작이라고 들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은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1908년 윤치호 역술 ‘찬미가’가 발행된 시기 직후 미국과 하와이에서는 신한민보 등에서 애국가 또는 ‘국민가’(동일 가사)의 작사자를 윤치호로 표기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증언에 가치를 둔다면 1910년 전후 미국에서 안창호가 작사자라고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는 사실이다. 5. 윤치호 작사설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교육자·정치가·저술가·개신교 운동가·계몽 운동가·언론인·독립협회·만민공동회·신민회·청년학우회의 일원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 신자이자 초기 개신교의 세례교인이다. 개화파로 독립신문사의 창립 인사 중 한 명이자 제2대 사장이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통해 계몽운동, 민권운동, 의회설립운동을 벌이고, 황제에게 불충(不忠)하는 역적으로 취급 받고 민중들의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민중을 경멸하였고 노선을 변경하여 실력 양성론에 매진하다가 흥업구락부, 수양동우회, 청구구락부 사건, 일제경찰의 미행과 내사 등을 견디지 못해 친일로 전향하였다. 애국가 작사 문제는 문헌과 증언과 상황이 확정에 이르는 단계이지만, 친일 프레임에 발목을 잡혀 공론화되지 못하고 있다. 윤치호작사설 항목은 다양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네 개의 그룹인데, 하나는 한영서원 제자들의 증언, 둘은 가족의 주장, 셋은 지인들의 주장, 넷은 평론가 또는 제3자의 증언이다. 이제 각 측의 주장과 앞의 네 작사설을 교차검증하여 증거 자료의 가치를 확인하기로 한다. 한영서원 제자 신영순(申永淳) 외 3인의 증언이 비중 있게 수록되었다. 우선 ‘特別讚美歌集’ 즉, 초판 ‘찬미가’의 존재를 알려 준 것으로 의미가 크다. "제1장이 국가(영민요곡), 제2장이 황실가(영민요곡)이고, 그 다음이 독립가와 신병가 등이었는데, 곡조는 찬송가 곡이었다”라고 하여 재판과는 다른 편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첫째 제1장이 국가(KOREA), 제2장이 황실가로 편제된 점, 둘째 재판 ‘찬미가’에 없는 찬송가 곡조의 ‘독립가’와 ‘신병가’가 수록된 점, 셋째는 현 애국가가 수록되지 않았다는 점, 이상의 세 가지를 들어 재판과 다른 초판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특히 현 애국가가 수록되지 않아 작사 시점이 1907년이란 점을 보강해주기도 한다. ‘찬미가’ 초판은 1906년 10월 ‘한영서원(韓英書院)’ 개교 첫 입학생 14명에게 배포하기 위해 소규모로 출판을 했고, 1907년 작사한 현 애국가 외 2편의 ‘애국적 찬미가’와 12편의 번역 찬송가를 포함하여 재판을 1908년 6월에 발행하였다. 이의 존재를 바로 한영서원 학생들의 체험적인 직접증언으로 확인시켜 준 것이다. 이어서 1913년 "창가를 수집하여 비밀로 노래책을 출판하였다가 투옥되고 압수를 당했는데. 제1권 제1장 ‘애국가’에는 윤치호 작이라고 명기 되었다”라는 증언도 있다. 이 창가집의 실물이 없어 사실 여부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노래책에 대한 ‘창가책사건’ 관련 기록에는 ‘윤치호 작 애국가’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사실로 받아드일 수 있을 것이다. 제자 최규남의 증언 역시 매우 구체적이다. 9세로 한영서원 다닐 때의 경험을 진술한 것인데, "한영서원 벽장문에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라는 지금의 애국가를 붓으로 써 부치고 선생 朴嶼陽(강화출신)씨가 우리에게 가리켜주며 이것은 윤원장(윤치호)이 만드신 것이라고 수차 말한 것을 기억한다”고 하였다. 제자 김동성도 50년 전부터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었다며 "학생들은 매일 아침 윤선생(윤치호)이 만든 애국가를 불렀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였다. 두 명의 또 다른 제자는 ‘唱歌集’과 ‘讚美歌冊’을 언급하였는데, 이는 윤치호 역술 ‘찬미가’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혼동을 한 부분으로 판단된다. 다른 인물들의 작사설과는 다른 전문가의 증언이 있다. 박은용과 주영환이다. 평론가 박은용(朴殷用)은 동아일보 1948년 10월 6일 자 ‘愛國歌考’에서 윤치호가 1945년에 남긴 ‘자필 가사지’의 증거력을 통해 윤치호 작사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이 주장은 1947년 발행한 이광수의 전기소설 ‘도산안창호’의 오류를 이미 7년 전에 지적한 것이다. "윤치호 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를 무시하고 거짓으로 도산 선생 작품을 만들 필요는 없다” 좌익계 음악평론가의 이 질타는 친일파 척결이라는 첨예한 시점에서 시류에 따라 안창호가 민족지도자라는 이유로 애국가 작사자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 것이다. 주영환(朱榮煥)은 다음 세 가지 사실을 들어 윤치호 작사 사실을 주장했다. 하나는 기자협회보 3호에 서정주가 쓴 ‘청년 이승만’에 "이승만 박사로부터 친히 口傳을 받은 筆記”에 근거하여 윤치호를 작사자라고 한 사실, 둘은 1908년 재판 윤치호 역술 ‘찬미가’ 제14장에 현 애국가가 수록되었다는 점, 셋은 윤치호 자손이 이광수에게 정정을 요청했다는 사실이다. 이 세 번째는 앞의 안창호설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의 증언을 상쇄시키는 것으로 의미가 큰 증언이다. 윤치호작사설에 특이한 두 인물의 주장도 있다. 백락준과 최남선으로, 백락준(白樂濬, 1895~1985)은 애국가 작사자 조사를 주관한 문교부 전임 장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증언은 서울신문에서 밝힌 내용을 인용한 것인데, 자신이 윤치호로부터 직접 받은 ‘찬미가’를 통해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 ‘찬미가’를 6.25 때 분실했다고 하였다. 당시 조사위원회에서는 이 책을 찾는다는 기사를 낼 정도로 결정적인 증거력을 지닌 자료였다. 최남선의 증언은 간단명료했다. 그러나 매우 큰 효력을 발휘한 증언이다. 윤치호 가족 측에서 1945년 작성한 ‘자필 가사지’의 ‘一九0七年 尹致昊 作’ 표기 문제, 철자법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이에 대한 평가를 한 것이다. "<一九0七 尹致昊作>이 眞이라면 윤 씨 작이라 하여도 無妨할 것이다” ‘1907년 윤치호 작’이란 표기는 가사를 쓴 시점이 아니라 작사를 한 시점을 밝힌 것이기에 서법에 문제가 없다는 것, 그리고 윤치호가 이른 시기에 어문법에 관심을 보인 인물임으로 역시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이 ‘자필 가사지’가 윤치호가 직접 쓴 진적(眞籍)이라면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주장이다. 이 최남선의 증언은 조사위원회가 결성되어 위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유지된 기조이다. 첨언한다면 최남선은 조사자료 ‘애국가의 종류’에서 ‘대한제국애국가’와 현 애국가는 다른 것임을 분명히 밝혀 전문가적인 소견을 피력한 인물이다. 윤치호작사설 주장의 의미 있는 그룹은 윤치호 가족들이다. 사위 정광현, 이복 동생 윤치왕이 그들이다. 정광현(鄭光鉉, 1902~1980)은 윤치호의 셋째 사위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작사자 조사 기간 두 번에 걸쳐 의견서를 제출할 만큼 적극적인 활동을 한 가족 일원이다. 조사자료에는 ‘찬미가’ 재판의 존재를 제시하고, 1945년 작성된 윤치호의 ‘자필 가사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佐翁 筆跡의 애국가는 1945년 作故하기 전에 가족들의 請으로 讚美歌集에서 베낀 것이다. 謄寫할 때 綴字法도 多少 고치고 또한 ‘임금을 섬기며’의 句는 이미 改作한 것이라 하야 現 歌詞로 고쳐 썼다.” 윤치호 작사 사실을 입증하는 가장 증거력이 큰 사료인 ‘자필 가사지’의 작성 배경으로 의도적으로 남긴 것이 아니라 가족들의 청에 의해 기념으로 남긴 것이란 사실을 밝힌 것이다. 더불어 ‘찬미가’ 제14장 4절 가사 중 "님금을 섬기며”가 "충성을 다하야”로 바뀐 이유에 대해 가족들이 바뀐 부분 대로 쓸 것을 청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밝혔다. 이로서 <찬미가> 제14장과 차이나는 문제를 해소한 것이다. 윤치왕은 1907년 "애국가 ‘백두산이’(영국민요)를 지어 학교에서 부르고 소책자로 박어서 분배”했다고 ‘찬미가’의 존재를 증언했다. 이상에서 살핀 5인에 대한 작사설을 조사하기 위해 작성한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를 분석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이 조사자료는 1955년 4월 2일 자 경향신문 기사로 촉발되어 5월 13일 자료집을 발간하고 조사가 시작되어 1956년 8월 31일 최종회의에서 윤치호를 작사자로 결론 내는데 활용하였다. ②작사자로 거론된 인물은 윤치호 안창호 최병헌 김인식 민영환 5인이며 단독작사설 합작설 개작설이 있었다. ③주요 내용은 애국가 화창(和唱) 사례, 애국가의 종류, 작사설, 부록, 참고문헌 목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④ 각 작사설을 요약하며 다음과 같다. 민영환 설은 1902년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 1916) 작곡 ‘대한제국애국가’ 악보집 서문에 이름이 올라있는 것에 대한 오해로 비롯되었다. 최병헌 설은 ‘불변가’라는 시에서 남산을 본 감상을 더해 작사했다고 하나 이 원작은 확인이 되지 않아 가족들이 제기한 설일 뿐이다. 음악가 김인식의 작사설은 윤치호의 ‘무궁화가’ 3,4절에 자신이 지은 1, 2절을 구성해 1910년 발표한 ‘愛國歌’(KOREA)를 오해한 제자들 유포한 설에이를 철회하지 못한 본인이 주장한 설이다. 안창호 설은 이광수가 지은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에서 비롯되었다. 1908년 9월 대성학교 개교로 윤치호가 교장으로 왔을 때 안창호가 지은 현 애국가를 보여주고 양해를 받아 발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안창호가 윤치호에게 보여주고 후렴을 사용하는 것에 양해를 얻었다는 시점이 이미 윤치호가 작사하여 역술 ‘찬미가’에 수록, 발간한 이후여서 시점이 문제가 된다. ‘찬미가’가 발행된 것은 3개월 전이 1908년 6월이기 때문이다. 이는 에피소드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되는데, 바로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애국가 관련 기사의 탈맥락상과 연동이 되는 것으로 안창호 설은 근거를 잃게 되었다. 이 역시 대성학교 학생들과 임시정부 관련자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설인 것이다. 윤치호 설은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만으로도 작사 사실을 확정할만하다. 홍색 표지의 초판과 재판 역술 ‘찬미가’가 제시되었고, 1945년 작성된 ‘자필 가사지’까지 제시되었다. 또한 한영서원 제자들의 구체적인 증언이 있고, 가족들의 확신으로 자료가 제시된으로서 작사 사실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거론한 이들은 상호 보완적인 역활을 하여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사실 한 두 가지의 자료만으로는 그 진실을 주장하기에 부족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이 증거자료와 증언의 부합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결국 이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는 거의 윤치호가 작사자라는 사실을 전제로 작성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1년 6개월간의 3차에 걸친 조사위원회 회의는 이 자료집에서 제시한 윤치호 관련 자료와 증언의 교차검증 과정이기도 하였다.(물론 조사과정에서 1910년 신한민보 ‘국민가 윤치호 작’ 자료 등 확인) 이런 점에서 이 자료집은 윤치호 작사 사실을 확정하는데 결정적인 자료집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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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씨알사상연구소 박제순의 과잉된 ‘안창호 숭배’일찍이 흥사단과 좌파 인물들에 의해 윤치호에 가한 프레임은 ‘친일파’로 금기와 제한을 강요당했다. "친일파는 어떤 것도 허용될 수 없다”거나 "애국가 작사자도 될 수 없다.”는 등이 그렇다. 이는 지나칠 대로 지나친 상태이다. 이 과잉의 진영논리에 가담한 이가 두 번째 비판 대상인 박재순이란 인물이다. ‘씨알사상연구소’ 소장이란 직함을 가진자로 유튜브 등을 통해 안창호설을 유포하고 있다. 이번 글 ‘도산안창호는 어떻게 애국가를 지었는가’의 필자이다.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도산안창호포럼 2021년 09월 30일 발표한 결과물로 도산안창호포럼 제3집 단행본 ‘애국가 작사와 도산안창호’ 두 번째 게재 글이다. 이 글의 논지는 애국가를 안창호의 철학과 사상에 대입하면 안창호가 작사자라는 결론이다. 말로는 문헌자료와 증언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극복하기 위하여 현대문헌비평학의 방법으로 작사자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고는 하였으나 가사 4절의 주관적 해설로 결론을 내린 정도의 글이다. 논증 없이 억지 주장과 왜곡으로 읽기가 힘들 정도의 동어반복 구문이다. 하여튼 문면상에서는 나름대로 연구를 하였다고 하였으니 따라가 보기로 한다. 첫 문장은 이렇다. #1 "나는 도산 안창호의 정신과 철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도산이 애국가를 지었다는 확신을 얻고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24쪽) 사료 비판과 교차 검증, 그리고 선행연구와의 대비라는 기본 과정이 아니라 특정 인물의 정신과 철학에서 논쟁적 사안의 결론을 찾고자 한다니 자폐적 연구임을 자인한 것이다. ‘확신’은 연구 과정의 개인 감정이지 결과는 아니다. 연구의 결론은 확신 단계 그 이상의 사실 입증에 의한 진실 추구여야 한다. 이런 ‘확신’은 대개 확증편향일 수 있고, 어쩌면 흥사단의 주문 생산 아니면 진영논리에 의해 꿰어맞춘 글이기 십상이다. 다음과 같은 진단 자체도 모순이다. 윤치호 작사 사실은 간명하고 정연한데 반해, 안찬호설은 혼란스럽고 뒤얽힌 것인 데도 이를 뭉뚱그려 말했기 때문이다. 윤치호 작사 사실은 ‘찬미가’와 ‘자필 가사지’의 존재, 일제 감찰 기록과 각종 신문잡지의 기록, 그리고 가족과 동시대 지인들의 증언이 축차적이고 상호보완적이어서 뒤얽히지도 않고 혼란스럽지도 않다. 그래서 이런 문제 제기는 잘못된 것이다. #2 "안창호와 윤치호의 애국가 작사설에 관한 혼란스럽고 뒤얽힌 증언들과 문헌자료들을 바로 이해하고 극복해야 한다. 증언들은 안창호 작사설에 유리하고 문헌자료들은 윤치호 작서설에 유리하게 보인다. 문헌자료들을 중시하는 역사학자들과 일반 국민들의 관점에서 보면 윤치호 작서설이 유리하게 보이기도 했다. 이런 문헌자료들과 증언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대문헌 비평학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거듭 밝히지만 안창호설은 내세울 증거 자체가 없음은 물론, 증언 정도도 상호 모순 관계에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단적인 예로 가장 중요한 흥사단 역사 서술에서나 흥사단 노래 자료류에서 ‘애국가 안창호 작사’라는 기록은 찾을 수 없을뿐더러 해방 전까지의 많은 행사 기록에서 현 애국가 보다 ‘무궁화노래’가 주로 불렸다는 사실이 입증한다. 그런데 안창호설에서는 일종의 패턴이 확인된다. 그것은 작사설이 축적되는 과정에 순흥안씨(純興安氏)가 중심에 있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는 안익태→ 안춘근→ 안흥권→ 안민석→ 안용환에 이르는 흐름에서 가짜 사료 발표, 개작 주장, 합작설 생산, 그리고 조작 유도 등이 자행되어 왔다는 점이다. 또한 가지는 지인들의 증언과 주장에 번복과 유도성 증언을 생산했다는 사실이다. 주요한과 구익균 같은 이의 사례들이 그렇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상과 같은 현상이 주로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작사자 조사 이후 자행되어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반해 윤치호 작사 사실과 관련해서는 자연스런 자료 발굴 등으로 위와 같은 사례는 없다. 굳이 윤치호의 경우를 말한다면, 직접 기록 외에 1910년대부터 1940년대 말까지의 일제 탄압 기록과 국내외 신문 잡지 기사와 일본 유학생 자료, 특히 가족과 지인들의 증언이 동일방향을 갖는다. 특히 주목하는 것은 가족들의 주장이다. 사실이라면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 모를리가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1952년 미국에서 발행된 한국 주변 국가의 애국가(국가)를 수록한 E. R Griffith 편저 ‘National Anthems’에 윤치호 2녀 보희씨가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사실을 상술한 예와 ‘자필 가사지’ 등의 증거를 제시한 윤치호의 서랑(壻郞) 정광현 교수 같은 사례를 말한다. 이에 비해 안창호의 경우는 딸과 손주에 의해 2000년대 들어 떠밀려서 하는 듯한 방송 인터뷰가 있을 정도이다.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에 수록된 증언들에서도 같은 현상이다. 윤치호 작사 사실에 대한 부분에 비교하면 안창호 설의 증언은 극히 소략한 정도이다. 그것도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도산 안창호’ 관련 부분에 대한 이광수 부인 허영숙의 증언도 윤치호 가족의 주장과 대치(代置)되에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3 "나는 현대문헌비평학의 관점에서 윤치호 작사설의 증언들과 문헌자료들을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한 결과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은 근거가 없음을 확인하고 윤치호는 애국가 작사자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적어도 이 글에서 현대문헌비평학의 관점이니 하지만 박재순이 내린 결론은 "작사자는 윤치호가 아닌 안창호”라는 한 마디다. 그런데 여기에는 큰 함의가 있다. 작사자를 확정하는 것은 증거와 증언의 합리적 분석에 의해서인데, 이 글은 굳이 윤치호의 성향을 앞에 깔고 안창호의 사상(?)을 내세우는 방식이다. 이는 사상 검증의 사감(私感)으로 결론을 내리고 합리적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과 다름없다. 답하기 바란다. 합리적으로 검토한 윤치호와 안창호의 관련 ‘문헌자료’와 ‘증언’은 어떤 것인가? 이 물음에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윤치호의 문헌자료와 증언뿐일 것이나 이마저도 제시하지 않았다. 이런 글은 ‘검토’ 수준도 미치지 못하는 개인적인 소감(所感) 정도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윤치호 작사 사실은 이미 필자에 의해 문헌과 증언으로 결론을 내린 상태임으로 감당할 수 없어 거론하지 못했을 것이다. 과연 이런 상황인데 글을 어떻게 끌고 갈까? 당연히 기존 안창호설 주장자들의 기본 레파토리를 내세우고 있다. 바로 -이승만, 친일파 사학자, 국사편찬위원회가 안창호에게서 애국가 작사자 지위를 빼앗았다-라는 대목에서 직감할 수 있다. #4 "나는 그 당시의 조사과정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이승만과 친일파 지식인 이병도 백낙준 서정주 윤치영 등이 국사편찬위원회를 앞세워 안창호에게서 애국가 작사자 지위를 빼앗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국학의 대가 최남선, 서지학의 권위자 황의돈, 안창호와 함께 상해에서 일했던 주요한 등이 안창호 작사설을 주장했으나 이승만의 지침에 따라 이병도와 국사편찬위원회가 백낙준 서정주 등과 함께 안창호 작사설을 페기하는데 주력했다. 본래 문교부는 안창호를 애국가 작사자로 미국대사관에 통보하려 했다.”(29쪽) ‘면밀한 검토’ 대상인 증거나 증언, 그리고 교차 검증 등의 과정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신만의 주장을 과시하고 있다. 이승만과 친일파들이 국사편찬위원회를 앞세워 안창호의 작사자 지위를 ‘빼앗았다’ 또는 ‘폐기’하였다고 왜곡한 것이다. 이 말에는 어느 시점 이전, 즉 1955년 4월 13일 국사편찬위원회의 ‘애국가 작사자조사위원회’ 구성 이전까지는 안창호가 작사자였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박재순이 이를 사실로 믿었거나 누군가에게 믿게 하려는 술수라고 본다. 전자든 후자든 문제인데, 후자인 듯하다. 왜냐하면 마지막 문장에서 문교부가 미대사관에 안창호가 작사자라고 통보하려 했다는 기록을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배경을 상술하여 진의 파악해 보기로 한다. 1955년 4월초 공보처는 미국대사관으로부터 "귀국의 국가 작사자를 국내 백과사전 편집부에서 요청해 온 바 이의 필요상 문의합니다”라는 전문을 받는다. 이를 이첩 받은 문교부는 안창호 작사 안익태 작곡으로 통보할 것을 준비하였다. 이 상황은 정부 기관지 서울신문 4월 4일자 ‘우리나라의 애국가 美 백과사전에 삽입’이라는 제하에 보도를 하였다. "주한 미대사관에서는 우리나라 애국가를 美 백과사전에 삽입하여 세계에 널리 소개하고자 2일 문교부 당국에 애국가 연혁을 밝혀 회보하여 줄 것을 요청하여 왔다. 그런데 문교부에서는 도산안창호 선생이 애국가를 작사한 연월일과 방금 귀국 중에 있는 안익태씨가 당시에 작곡한 사실 등을 회보할 것이라 한다.” 이 기사가 애국가 작사자 논란의 발화점이 된다. 이 기사는 ‘~그런데 문교부에서는~’이란 주저함에서 알 수 있듯이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도산안창호 선생이 애국가를 작사한 연월일’이라고 하였지만 애국가 역사에서 윤치호의 ‘자필 가사지 1907년작’이란 기년(紀年) 적시 외에 월일을 내 세울만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기사는 팩트 체크를 하지 못한 명백한 오보이다. 그렇다면 이 문교부의 실책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이 시기 근거로 삼을 만한 공식적인 정부 기록은 없다. 다만 두 가지 사적(私的) 기록이 있을 뿐인데, 하나는 1947년 5월 발행된 이광수의 전기소설 ‘도산안창호’ 애국가 관련 기록이고, 또 하나는 동아일보 1948년 10월 6~8일자 음악평론가 박은용(朴殷用)의‘愛國歌考’이다. 이 기사를 통해 문교부의 오류가 두 자료에서 편의적으로 선택된 결과임을 알 수가 있다. ‘애국가고’를 통해 사안을 확인해 본다. 박은용의 글 첫 회에서는 ‘도산안창호’의 애국가 관련 기록을 전제했다. ‘도산안창호’의 내용 일부이다. "원래 이 노래는 도산의 작이거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려져서 국가를 대신하게 됨에 도산은 그것을 자기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애국가는 선생이 지으셨다는데 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란 기록이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윤치호 작사 증거인 ‘1907年 尹致昊作 자필 가사지’와 서정주의 이승만 전언(傳言) ‘기자협회보’ 기사, 그리고 1908년 윤치호 역술 ‘찬미가’ 등을 제시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故 윤치호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를 무시하고 거짓으로 도산선생 작품을 만들 필요는 없다. 만인이 애창하는 준엄한 애국가라는 점에서 더욱 그런 것이다.” 이렇게 1955년 이전에 작사자 문제를 거론한 기록은 이 두 가지 정도이다. 이 기사 7년이 지난 뒤에 ‘~그런데 문교부에서는~’이라며 안창호설을 대두 시킨 것이다. 이렇게 보는 데는 1948년 9월 제헌국회에서 애국가에 대해 논의를 할 때도 작사자 문제는 없었다는 사실에서 이다. 그러므로 문교부가 미국 대사관에 통보하려한 내용에는 안창호가 언제, 어떤 배경으로 작사를 했다는 등의 내용 적시가 아니라 전기소설 ‘도산안창호’의 애국가 언급 정도일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에서 박재순의 #4에서 안창호의 작사자 지위를 빼앗았다는 주장은 오판을 넘어 왜곡이 된다. 이런 결과는 다음과 같은 친일 프레임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다. 지금이나 그때나 ‘친일’은 용납될 수 없는 사상 문제로 이를 거론하는 순간 확증편항적 결과가 나오게 된다. 국사편찬위원회를 앞세워 작사자 지위를 빼앗은 "친일파 지식인 이병도 백낙준 서정주 윤치영”을 나열하고, 이어 "국학의 대가 최남선 서지학자 황의돈 안창호와 함께 상해에서 일했던 주요한 등이 안창호 작사설을 주장”했다고 하였다. 여기서 최남선을 ‘국학의 대가’라고 추켜세웠고, 흥사단 단우 주요한을 안창호 작사 주장자라고 하였다. 친일파로 치자면 누구 못지 않은 최남선을 예우한 것도 별나지만 증언을 번복한 주요한까지 포함하여 안창호 작사 주장자라고 제시한 것은 의외이다. 사실 최남선은 안창호설을 지지하지 않았다. 단지 윤치호 측이 제출한 매우 흐리게 현상된 ‘자필 가사지’ 사진을 접하고 문제를 제기하며 "1907 윤치호 작이 진(眞)이라면 윤씨작이라 하여도 무방(無妨)할 것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주요한은 1955년 4월19일자 경향신문 기고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에서 "안창호의 애국가 작사 주장은 하나의 신화”라고 못박았다가 1963년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에서 이를 번복한 바가 있다. 황의돈(黃義敦)은 윤치호 교장 시기 대성학교 교사로‘친필 가사지’ 원본이 제출되자 침을 묻혀 먹물이 묻어나자 오래 되지 않은 것이라고 의견을 제시했다 1945년에 쓴 것임을 알고 수긍한 인물이다. 1년 동안 3차에 걸친 조사위원회 발 기사를 주목하면 이들은 모두 최종적으로 윤치호 작사를 인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인데 이들을 친일파 대(對) 안창호설 주장자로 나눠 거론한 방식 자체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조사 과정 초기에 관심을 끌었던 안창호설은 2차 회의 부터는 거론되지 않았고,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 3차 최종회의 결과는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이다”였다. 다만 이를 확정 발표하는 것에 대해 거수 표결 결과 2인이 "만일의 경우 거부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고 타 작사자가 출현하는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가정”하여 윤치호로 발표하는 것을 유보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이를 문교부에 보고하였다. 약 30여차에 이르는 당시 보도를 순차화하고 맥락화하면 오류나 개인 감정이 개입될 여지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중반부터의 보도 경향은 윤치호에 대한 증거자료가 국내외에서 답지하여 이를 다룬 기사가 주였고, ‘자필 가사지’에 대한 필적 감정까지 과학수사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함에서 친일파 운운하여 ‘지위를 빼앗았다’거나 ‘폐기’하였다는 주장은 왜곡인 것이다. #5 "-도산은 애국가를 어떻게 지었나?-윤치호가 지은 무궁화가가 애국가로서 널리 불리워졌다. 무궁화가는 황실찬미가였음으로 민을 새롭게 일깨우는 신민회의 교육운동에 적합하지 않았다. 안창호는 무궁화가를 대체하는 새로운 애국가를 지어야 했다. 안창호는 무궁화가의 후렴을 그대로 가져왔을 뿐 아니라 무궁화가 1-4절과 글자 수가 일치하는 애국가 1-4절을 지었다. 안창호와 신민회가 윤치호와 독립협회를 계승하듯이 애국가는 무궁화가를 계승하였다.” ‘무궁화가’를 윤치호 작으로 인정한 것은 다행이다. 사실 필자가 ‘독립신문’ 영문판에서 서재필이 "계관시인 유치호가 지었다”는 기록을 찾아 발표하기 전까지는 필자 외에는 이를 윤치호 작사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를 기껏 찾아 정위 시켜 놓으니 이제는 이를 윤치호에 맥락화 하지 않고 엉뚱하게 안창호에 연결시키는 이들이 있는데 신용하이며 박재순이다. 사실을 맥락화 하지 못하고 안창호 작으로 변신시키는 일을 하는 이들로 안창호가 신민회에 적합하게 대체하였다는 주장이다. 그 실장이 지금 자행 되고 있는 것이다. 하여튼 박재순의 이 대목은 안창호는 윤치호와 황실찬미가인 ‘무궁화가’가 없었다면 애국가를 지을 수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안창호가 애국가를 지은 이유이고 과정이라고 보는 것인데,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안창호와 신민회가 윤치호와 독립협회를 계승하였듯이 애국가는 ‘무궁화가’를 계승하였다.”고 했다. 이 논리에 -윤치호는 애국가를 어떻게 지었나?-라는 물음을 윤치호로 대입한다면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작사 과정과 동기 등이 맥락적임을 알 수 있다. 윤치호는 1897년 8월 대조선개국 505주년을 기념하여 ‘찬미가 제10장’(‘무궁화가’)을 지었고, 1897년 10월 대한제국 선포를 기념하여 ‘찬미가 제1장’을 지었고, 1907년 한영서원 개교를 기념하여 ‘찬미가 제14장’을 작사하였다. 이와 함께 번역 찬송가 12편을 포함하여 1908년 재판 ‘찬미가’를 발간하여 염가(廉價) 보급함으로서 제14장 애국가는 한영서원은 물론 호수돈여학교 같은 인근의 기독교계 학교로부터 널리 확산이 되었다. 이상을 이해한다면 더 이상의 논란을 벌일 이유가 없다. 이에 대해 귀를 기울이지 않고 진영 논리에 함몰되어 오류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어지는 글에서도 매우 기묘한 논리를 전개하였는데, 유길준과 ‘독립경절회창가’를 끌어들였다. 임중빈의 안창호 전기 기록과 졸저 ‘애국가 작사자 연구’에서 착안한 듯한데, 안창호가 1907년 귀국 중 일본에서 만난 유길준에게 애국가의 작사를 요청하였다는 기록을 과도하게 해석한 결과이다. 박재순은 임중빈의 기록을 수용하여 자기식으로 재편하였다. 먼저 임중빈의 기록을 인용하고 박재순의 기술을 대비하여 본다. "도산은 유길준을 만나 자리에서 간청해 보았다. -우리나라에 국기는 있어도 아직 국가가 없으니, 선생님께서 지어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책은 좀 썼어도 노래를 지을 재능이 없소. 끝내 사양하였다.” 전후 맥락에서 안창호의 작사 요청이 담고 있는 진의(眞意)나 결과는 이렇다. 즉, 안창호는 귀국하며 미국처럼 국기와 애국가의 효용성을 국내 교육현장에서 실현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유길준 등을 만나고 귀국해 보니 관립기관과 기독교계에서는 이미 애국가를 부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애국가 작사가 아니라 그 보급에 힘을 쓰게 되었는 사실이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때문에 임중빈도 "작사자는 윤치호이나 널리 보급한 이는 안창호이다”라고 단언한 소이(所以)이다. 그런데 이를 박재순은 오독을 하였다. 다음, 유길준의 응답에 대한 문제다. 1895년에 ‘서유견문’ 집술과 ‘조선문전’을 저술했으니 책은 썼다고 한 말은 사실이다. 이어 노래를 지을 재능이 없어 거부했다고 했으니, 이 또한 사실로 받아들일 수가 있다. 그래서 박재순은 이 거부 사유를 빼버렸다. 바로 유길준이 12년 전에 ‘독립경절회창가’를 짖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여지를 숨기기 위해서이다. 박재순이 끌어 온 ‘독립경절회창가’는 1895년 5월 8일 청일전쟁의 승리로 맺어진 시모노세키조약 결과에 의해 조선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된 것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탄생하였다. ‘왕조실록’과 ‘속음청사’ 6월 14일자에는 간단하게 기록되었으나 18일자 일본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에는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었고, 이 창가도 전 8절 가사를 수록하고 작사자를 유길준이라고 하였다. 이 노래를 박재순은 어떻게 활용하였는지를 보기로 한다. 왜곡을 하였다. "안창호가 도쿄에서 유길준을 만나 애국가를 지어달라고 부탁했을 때 유길준은 애국가 짓는 것을 사양했지만 독립경절가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을 것이다.”(36쪽) ‘독립경절회창가’를 안창호와 연결한 것은 대단한 상상력 발휘 결과이다. 윤치호의 허다한 문헌 증거와 증언 들을 무시하고 사실 여부가 입증되지 않는 한 줄의 문장을 단서로 안창호 작사로 전복(顚覆)시키려는 야심을 담았으니 가능하다. 바로 안창호가 유길준의 ‘독립경절회창가’에서 영향을 받아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한 것이다. 연구 자세의 엄정성보다는 진영논리에 함몰된 만용이다. 이렇게 막 나가는 형편이다. #6 "–유길준의 독립경절가, 흥사단-‘독립경절가와 애국가를 비교해보고 안창호와 유길준의 특별한 관계를 고려하면 애국가 작사자는 안창호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안창호 애국가 작사설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역사 문헌적 증거라고 생각한다. 1895년 조선정부의 독립선고식에서 부른 유길준의 독립경절가는 안창호가 애국가를 작사하는데 큰 자극과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독립경절가는 황재와 조선국가를 찬양하는 노래이지만 6~8절은 현행 애국가의 내용과 사상이 일치한다.” 일본에서 만나 작사를 요청한 사실과 ‘흥사단’이란 단체명을 벤치마킹한 것을 ‘특별한 관계’라고 한듯하다. 그런데 유길준이 1914년에 사망하였으니 안창호와의 교분은 특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윤치호와 유길준은 부친 윤응렬로부터는 물론이고 1881년 일본 유학 동기로서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1897~1898)운영과 1910년까지 많은 계몽 단체의 조직과 운영에 함께한 사이이다. 더욱이 독립경절 원유회를 함께 주관한 관계는 주목이 된다. 그렇다면 이런 ‘특별한 관계’로 윤치호를 꼽을 수는 없는가? 그리하여 같은 논리로 유길준의 독립경절회창가는 윤치호가 ‘찬미가 14장’을 작사하는데 자극과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은 불가능한가? 그러나 안창호이든 윤치호이든 이런 가설은 성립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윤치호는 이미 유길준에 못지 않은 동서양 문물을 체험하여 국가적 기념일에 기념가를 지어 축하하는 풍조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저술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창호는 1907년 이전에 저술은 물론 노래를 지은 바가 없는데다 전통 율조의 가사체는 인식에 있었어도 후렴이 있는 서양식 시가는 인식이 부족했을 것이다. 첫 노래 ‘거국가’가 그 증거이다. 그래서 박재순은 독립경절회창가‘의 배경을 이해 못하고 현 애국가에 연결시켰다. 거기다 "애국가의 내용과 사상이 일치”한다고 이해한 6~8절만을 논거로 삼았다. 그런데 이 대목은 유길준만의 것이 아니다. 소위 상호텍스트성의 관계일 뿐이다. "6 장백산 높다해도 비교해 보라, 우리국민의 기염을, 도리어 낮구나. 저 산도 7 동해물 깊다해도, 비교해 보라, 우리국민의 진심을, 도리어 앝구나, 저 물도 8 이 기염, 이 진심, 두 개를 합치면 강한 힘, 저 힘을 가지고 우리 임금을 지키세.”(37쪽) 박재순은 이 3절의 용어, 내용, 정신이 유길준의 것으로 현 애국가 1~3절과 일치한다며 이를 안창호가 영향을 받았다고 하였다. 사실 8절 전체를 보면 내용과 정신은 애국가와 연결 시킬 수가 없는 내용이다. 행사 자체가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중국으로부터 빼앗았음을 중국과 조선에 경고하는 행사이고, 이에 따른 기념가이기 때문이다. 이를 간과한 박재순은 애국가 가사를 모독한 것이기도 하다. 나머지 ‘용어’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이 자료가 지상에 공개되자 노동은 교수 같은 윤치호 작사 부정론자들은 윤치호가 이를 표절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때도 필자는 같은 논리로 반박한 바 있는데, 즉 전통 시가작법에 용사(用事)가 있다. 한시를 지을 때 전고(典故)나 사실을 인용하는 시작법으로 경서(經書)나 사서(史書) 또는 여러 사람의 시문에서 특징적인 관념이나 사적(事迹)을 몇 개의 어휘에 집약시켜 시의(詩意)를 배가시키는 방법이다. 이는 시론에서는 상호텍스트성으로, 민요론에서는 공식어구(formula)로 말하기도 한다. 실례를 들기로 한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시계열상으로 살펴야 한다. ① ‘자차통감’과 ‘통감절요’의 서약문 "황하의 강물이 말라서 띠같이 가늘어지도록, 태산이 닳아서 숫돌같이/ 작아지도록, 봉해주 신 나라 영원하소서” ② 남이장군(南怡將軍1443년~1468)의 ‘북정가(北征歌)’ "백두산 높은 봉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깊은 물은 말을 먹여 다 없애리라” ③ 유길준(1895)의 ‘독립기념경절회창가’ "장백산 높다해도 비교해 보라, 우리국민의 기염을, 도리어 낮구나/ 장백산 높다해도 비교해 보라, 우리국민의 기염을, 도리어 낮구나. ④ 윤치호(1907) ‘찬미가 14장(현 애국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유하사 우리나라 만세” 이상을 통해 박재순이 말한 ‘용어’와 그 표현의 문제는 ‘독립경절회창가’가 기준이 아니라 더 이른 시기, 더 많은 작품들이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함에서 유길준과 ‘독립경절회창가’가 없더라도 이런 용어와 표현은 가능한 것이고, 애국가는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이 된다. 작사자를 윤치호로 보든 안창호로 보든, 이런 방식은 논증이 아닌 상식의 영역이다. 이런 관점에서 ‘마르고 닳도록’이란 영원성을 표현한 것은 곧 ‘하나님이 보우하사’를 수식하여 기원의 간절함을 강화시켜 준 것이다. 결국 "안창호와 유길준의 정신 사상적 일치를 감안하면 안창호가 애국가를 지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한 단언은 본질을 놓치고 쌓은 모래성일 뿐인 것이다. 이제 박재순의 글에 대한 반론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애국가에 담긴 도산의 생각’, ‘애국가에 담긴 안창호의 사상과 정신’, ‘애국가에 담긴 안창호의 정신과 삶’이란 3개 항목에 대한 비판은 생략하기로 한다. 앞에서 살폈듯이 잘 못 된 논증으로 설정한 ‘안창호 애국가 작사’는 사상누각(沙上樓閣)이기에, 이를 대상으로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도산안창호는 어떻게 애국가를 지었는가’의 마지막 네 문장은 주목하여 거론하고자 한다. 이를 졸고의 결론으로 삼고자 한다. 주목하는 네 문장은 이것이다. #7 "애국가는 안창호의 기도이고 노래이고 정신이고 철학이었다. 애국가는 그의 삶과 정신을 이끄는 깃발이고 지침이고 철학이었다. 애국가는 그의 삶과 정신을 이끄는 깃발이고 지침이고 고백이고 선언이었다. 그는 애국가를 살았고 애국가는 그를 살리고 지키고 이끌었다.” 안창호에 대한 과한 수식이다. 그런데 아무리 수식이라고 하지만 그냥 넘길 수가 없다. 바로 ‘기도’ 때문이다. 기도의 대상은 당연히 ‘하나님’이다. 안창호는 1895년 미국 북장로회 계통 선교사 H. G. 언더우드가 설립한 구세학당(救世學堂)에 입학하였으니 기독교인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안창호는 하나님을 성호(聖號) 하며 신앙고백을 한 바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엄연한 사실에 의해 결론은 내리면 이렇다. "애국가는 안창호의 기도일 수 없다. ‘하나님’이라는 성호를 가사에 썼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창호는 명백하게 애국가의 작사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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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족음악원 이사장 이광수, "국악계가 상생(相生)의 길로 나아가야"사물놀이 창시자, 비나리 명인 이광수 선생이 운영하고 있는 민족음악원이 올해 창립 25주년을 맞이한다. 사물놀이는 1978년 농악기 치배의 핵심 악기인 꾕가리, 장구, 북, 징을 가지고 농악가락을 정리해서 발표하여 새롭게 탄생한 농악 장르이다. 열광적 농악 연주의 대명사 '사물놀이'는 가락에 집중하고, 농악 가락을 서서 연주하던 것을 수정하여 앉은 형태로 만들었다. 최근 '2024사물놀이 겨울캠프 1기'를 마치고 다음 갬프를 준비하고 있다. 전국에서 이광수 선생 수업을 받기 위해 국악인들이 예산을 방문하고 있다. Q.이사장님 지난 1년 동안 (사)민족음악원 어떻게 전승 활동을 하셨는지요. 회장님 사적인 일도 알려주세요. A. 안녕하십니까? (사)민족음악원 이사장 이광수입니다. 먼저 물심양면으로 대한민국 국악 발전을 위해 애쓰고 있는 ㈜국악신문사 기미양 발행인과 직원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새해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지난해(癸卯年)의 전승 활동에 대해 답변드리자면, 기나긴 ‘코로나19(COVID-19)’의 터널이 지나가고 드디어 여름, 겨울로 이어지는 ‘사물놀이 계절 캠프’와 매달 마지막 주에 진행되는 ‘사물놀이 월말캠프’ 등 일상적인 전승 활동이 재개(再開)되었던 한해였습니다. 그리고 올해(甲辰年)로 24회째를 맞이하게 되는 ‘예산전국사물놀이경연대회’도 비대면 영상심사에서 대면대회로 전환되어 성황리에 진행되었습니다. 사물놀이 경연대회는 각축(角逐)을 벌이는 경연의 장이기도 하지만, 전승 현황을 짚어보고, 앞으로의 전승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전 지구적 재난을 겪고, 다시 시작된 사물놀이 캠프와 경연이다 보니 여러 가지로 우려되는 사항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열정적인 참여와 향상된 경연 수준이 확인되는, 가슴 뿌듯한 자리였습니다. 이제 고희(古稀)를 넘어선 나이에 날로 발전하는 후학(後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후학을 양성하는 것을 앞으로 인생의 지향(志向)으로 삼고 살아갈 계획입니다. Q. 단체를 간략하게 소개해 주세요. A. (사)민족음악원은 저의 고향인 충남 예산에서 1999년에 설립한 단체입니다. 돌이켜보면 사물놀이를 세상에 내놓고, 전 세계를 순회하며 수많은 공연 활동을 해왔습니다. 지구촌 곳곳을 다니며 국악을 세상에 알리는 것뿐만 아니라, 가는 곳마다 국빈(國賓)에 준하는 대접을 받을 만큼 우리 문화의 위상을 높이는 데도 공헌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K-POP이 전 세계에 대한민국을 알리고, 국가 위상을 드높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여정 속에 서서히 자리 잡게 된 생각은, 내 고향 예산에 뭔가 공헌할 방법과 후학 양성에 대한 것입니다. 예산군과 예산 지역 인사들이 저의 뜻을 헤아리고 협조해 주셨습니다. 현재 민족음악원은 설립 25주년을 맞이하고 있고, 공연 활동과 전승 활동, 그리고 대한민국 전통예술 전반에 관한 연구 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단원이 30년 이상의 전승활동 경력을 가지고 각자의 영역에서도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Q.지난 해 얻은 성과는 A. 앞서 말씀드렸듯이 공연 활동과 교육 활동의 중단을 초래했던 ‘코로나19’가 지나가고, 서서히 일상적인 활동이 재개되었습니다. 일단은 3년 정도의 휴지기(休止期)를 지나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것. 그 자체로 반가운 일이었고, 원활한 일상으로 복귀하기 위한 내적 정비와 점검, 그리고 진행을 해왔던 지난해였습니다. 그간 적잖은 변화가 있었더군요. 어려운 생활환경 속에 예술 활동을 포기하는 예술가도 있었고, 지속적이었던 교육의 대상이 새로운 인원으로 교체되기도 하고, 신생팀들이 등장해서 새로운 예술의 장을 열어가기도 했습니다. 앞으로도 어떤 변화와 재난이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합리적인 원칙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전통예술의 맥을 이어가는 데에 주력하겠습니다. Q.새해 역점사업은 A. (사)민족음악원은 협력 기관인 ‘충남전통예술강사협동조합’과 손잡고 ‘비나리 자격증’과 ‘사물놀이 자격증’을 발급하려 합니다. 체계적인 예술 교육과 전통예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물놀이를 올곧게 전승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인재 양성을 위해, 일정 시간의 자격검정 연수 과정을 수료하면 응시 자격이 부여되고, 자격검정 시험을 통해 공신력 있는 자격증을 발급할 계획입니다. 이것은 ‘사물놀이’를 만들고 세상에 내놓은 당사자인, 제가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로 여겨집니다. 자격증 발급기관 인증은 끝난 상태이고, 자격검정 연수 교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는 일상적인 공연 활동, 교육사업, 그리고 사물놀이 경연대회를 더욱 내실 있게 진행하는 것이 변함없는 목표라 할 수 있습니다. Q.국악계에 하고 싶은 말 A. 종종 안팎으로 소란스러운 일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의 대부분은 공적(公的) 태도를 가지느냐, 사적(私的) 태도를 가지느냐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즉, 공적 이익에 힘써야 할 위치에서, 사적 이익을 추구하다 보니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예술 활동은 기본적으로 이타적(利他的) 행위라 생각되고, 문화는 한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이기적 행위와 그릇된 소유욕은 문화예술 발전에 커다란 걸림돌입니다. 조금 더 넓은 마음으로 모두가 상생(相生)의 길 위에 설 수 있도록 다 같이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갑진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가내 두루 평안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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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진흥법 제정’, 자부심 만발국악진흥법 제정 주체임을 자임하며 시행령 마련과 시행을 주도한다는 주인의식으로 출범한 한국국악진흥예술연합이 구심력을 갖추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기념공연을 개최했다. 31일 오후 4시부터 두 시간에 걸쳐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11 종목 99명 회원들이 꾸민 무대였다. 1부(김세종)와 2부(이수현) 사회자의 맨트는 물론, 축사자나 출연자들이 표명한 멧시지는 분명했다. 국악진흥법 마련과 그 통과에 대한 자부심과 이의 시행안 마련과 시행에 대한 주도권을 갖는다는 자신감이 그것이다. 국악진흥법 시행의 4축인 국회, 문화체육관광부, 국악기관(국립국악원/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국악방송), 그리고 동력을 추동한 국악인들. 이 중 국회에서 임오경 의원이, 국립국악원의 김영운 원장이 참석하여 이를 분명히 하였다. 법안 대표 발의자인 임오경 의원은 "임웅수 감독의 강력한 호소에 동의하여 2005년 처음 ‘전통문화의 보존 및 진흥에 관한 법률’이 입법된 것으로부터 7차례의 입법과 폐기를 반복하던 법안을 제가 승부사적 기질을 발휘하여 18년만에 통과를 시켰다”고 하였다. 김영운 원장은 "국악의 힘을 지탱할 법률적 기반이 없어 아쉽던 차에 국악진흥법이라는 거대한 울타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온 한국국악진흥예술연합에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화답인듯 한국국악진흥예술연합 이영희 이사장은 "국악진흥법 제정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뜻에서 준비된 이번 공연을 기점으로 구심력을 갖추고 기쁨 넘치는 국악계”가 되자고 하였다. 출연자인 사물놀이 이광수, 신영희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 김청만 판소리 고법 보유자, 이호연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등은 물론, 객석에서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과 이생강 대금산조 예능보유자 등이 이상에 대해 동의를 표하였다. 한편 국악진흥법 제정 목적에는 "국악을 보전ㆍ계승하고 이를 육성ㆍ진흥하며 국악문화산업을 활성화 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국민의 문화적 삶의 질 향상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였다. 이를 위해 정부 기관은 국악의 체계적이고 짜임새 있는 지원 대책과 국악 정책을 마련하고, 시민단체는 그 역할과 의무가 무엇인지를 심도 있게 논의하고, 그 대안 마련을 해야 한다. 주체 측은 이번 공연에서 내 비친 자부심 만큼, 그 역할과 의무가 무엇인지를 점검하여 시행령 마련에 진력을 다하는 계기여야 한다. 특히 ‘국악의 날’ 제정에 대해서도 국악인들의 공감을 얻어 제정해야 한다. 초년 기자에게도 공연 주최 측의 멧시지가 선명하게 전달되어 국악진흥법 시행으로 달라진 국악계의 모습이 크게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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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진흥법 제정기념 ‘희설囍泄’어제 31일 오후 4시,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한국국악진흥예술연합(이사장 이영희)이 주최하는 대규모 해넘이 잔치가 열렸다. 이번 행사는 11종목 99명이 출연한 대규모 공연으로 국악진흥법 제정의 의의와 기대감을 전하는데 충실한 공연이었다. 국회의원 임오경의원, 김종규 국민신탁 이사장, 김영운 국립국악원장, 이생강 대금 예능보유자, 유지숙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등이 객석에서 흥을 함께 했다. 첫 무대는 이광수 선생 외 4명이 ‘비나리’로 열고, 선소리 산타령, 살풀이 춤, 경제시조, 단막 창극, 판소리 춘향가, 가야금 병창, 승무, 남도민요, 유희, 마지막 무대는 서울굿으로 관객에게 흥겨움을 선사했다. 이번 행사의 예술감독을 맡은 임웅수 부이사장은 "‘희설-기쁨이 피어난다’는 "국악진흥법 제정을 기념하고, 본 연합회가 주최한 정책토론회의 결과를 공유하고자 하는 뜻으로 마련한 공연입니다. 이 공연을 통해 국악진흥법 시행령 마련에 갖는 계기가 되리라 믿습니다.”라고 하였다. 김영운 국악국악원장은 "국악진흥법 이라는 거대한 울타리를 마련함으로서 법률적 지원이 확충 되리라는 기대를 갖게 합니다.”라고 하였다. 한편 국립국악원 강원분원 유치에 기여한 권성동 의원이 축사를 보내 축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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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놀이 창시자 이광수와 함께하는 '2024사물놀이 겨울 캠프'사물놀이 창시자이자 비나리의 명인인, 예인 이광수와 민족음악원이 주관하는 "2024 사물놀이 겨울 캠프”가 2024년 1월 8일(월)부터 12일(금)까지 4박 5일간 충남 예산군 오가면에 위치한 (사)민족음악원에서 진행된다. (사)민족음악원 이사장인 이광수 명인이 직접 지도하는 비나리반에서부터 공연활동 경력 30년 이상인 단원들의 사물놀이, 설장고, 채상소고놀이 등 다양한 수업이 준비중이다. 참가 신청서는 네이버카페 [사물놀이캠프](https://cafe.naver.com/samulnoricamp)에서 다운로드 받아서, 작성 후 이메일로 접수하면 된다. 이 프로그램은 예산군과 충남전통예술강사협동조합이 후원한다. 민족음악원 자세한 장소 주소는 충남 예산군 오가면 내양막길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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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Ⅳ 찬미가 ‘Patriotic Hymn’의 전승 과정현 애국가의 출현은 1908년 6월에 발행된 윤치호 역술 '찬미가' 재판에 수록됨으로서 이다. 제15쪽 ‘Patriotic Hymn(Auld Lang Syne) 뎨十四’이다. 그런데 이 책이 재판(再版)임으로 초판 발행은 한영서원을 개교한 1906년 10월 전후로 본다. 그런데 윤치호가 1945년 작고 직전 자필로 남기 가사지에 ‘1907년 작’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이 초판에는 현 애국가가 수록되지 않았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작사 시점도 1907년부터 1908년 6월 어간이라고 보게 된다. 이렇게 출현한 ‘찬미가’ 제14장 현 애국가는 또 하나의 애국가에서 대표적인 애국가로 확정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1) 1908년 재판 찬미가 제14장 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히 보전하세 二. 남산우헤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이슬 불변함은 우리 긔상일세 三. 가을하날 공활한대 구름업시 놉고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四. 이 긔상과 이 마 음으로 님군을 섬기며 괴로오나 질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애국가 가사 4절의 면모이다. 당시 기독교인들에게나 일반인들에게도 국가 안녕과 독립에 대한 기도문으로 통하여 자연스럽게 연계, 수용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무궁화 노래’와 일정 기간 까지는 길항(拮抗) 관계로 불리다가 3.1운동기를 계기로 대표적인 애국가가 되었다. 2) 1910년 9월 미주 신한민보 ‘국민가’ 一. 동물과 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ᄂᆞ님이 보호ᄒᆞ샤 우리 대한 만세 (후렴) 무궁화 삼쳔리 화려강산 /대한사ᄅᆞᆷ 대한으로 길히 보전ᄒᆞ세 二. 남산우헤 뎌 소나무 철갑을 둘은 듯 /바ᄅᆞᆷ이슬 불변ᄒᆞᆷ은 우리 긔샹일세 三. 가을하ᄂᆞᆯ 공활ᄒᆞᆫ데 구름업시 놉고 /발근 달은 우리 가ᄉᆞᆷ 일편단심일세 四. 이 긔샹과 이 맘으로 민족을 모흐며 /괴로오나 즐거우나 나라사ᄅᆞᆼ하세 미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기관지 ‘신한민보’ 제1면에 ‘국민가’라는 곡명으로 게재된 전4절 가사다. 주목되는 것은 ‘윤티호 작가’라고 밝혔다는 사실이다. 이는 애국가 자료를 게재한 매체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인데, 작품 자체를 소개하는 목적이기 때문에 제1면에 가사 전4절과 함께 작사자를 밝힌 것이다. 매우 의미 있는 전승기록이다. 찬미가 제14장과 다른 점은 ‘아래 아’ 표기를 했다는 점과 4절 ‘님군을 섬기며’가 ‘민족을 모흐며’로 변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제14장을 텍스트로 하지 않고, 구술에 의한 것으로 보게 한다. 특히 눈에 띠는 것은 곡명이 ‘국민가’로 변이 된 점이다. 이는 ‘국민회의 회가(會歌)’로 기능을 부여하기 위해 고쳤다고 보게 된다. 더불어 제4절 ‘님군을 섬기며’도 국권 상실로 임금이 없음으로 ‘민족을 모으며’로 수정한 것으로 보게 된다. 3) 1912년 간도 용정촌 애국가 간도 용정촌 국자가(龍井村 局子街) 한인의 소지품을 일본총영사관이 압수, 보고한 자료에 들어있는 애국가이다. 이 창가집에는 소년보국가·운동가·한반도가·대한혼가·부모은덕가·학도가·혈성대가·영웅모범가·조국생각과 함께 애국가가 들어있다. 일본어로 번역하여 보고한 애국가는 후렴구 1절 마지막 구절이 ‘우리민족 만세’로, 마지막 구절이 ‘길이 광복하세’로 되어 있다. 후렴구 일부를 변이시킨 것은 의외이다. 4) 1914년 「태평양잡지」 애국가 이승만(1875~1965)이 1913년 9월 하와이에서 창간한 월간 「태평양잡지」 1914년 4월호에 ‘애국가와 찬미가’라는 기사에 수록된 자료이다. 2000년대 들어 국내에 입수되어 확인 되었다. 애국가 작사자를 윤치호라고 밝힌 자료이다. 「찬미가」를 언급하면서 "무궁화 곡조에 다른 말로 만든 것”이 애국가라고 하였다. 특히 애국가의 탄압 실상을 밝히고 있는데, "찬미가는 본국에서 압수하고 매매를 금지한 책인데 한 권을 우리가 얻었기로 대강 뽑아서 등재하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차차 노래를 애국제도로 모본하여서” 국내에서 찬미가를 압수하고, 애국가를 금지했음을 전했다. 이 시기 윤치호는 ‘105인 사건’으로 대구형무소에 투옥(1913~1915)돼 있었다. 국내에서는 이를 기사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국내에서는 조선총독부가 불온서적으로 낙인찍어 소유자들이 스스로 폐기, 희귀해졌다는 사정도 알려 주었다. 5) 1915년 간도 광성중학 교재 수록 애국가 중국 간도 소영자(小營子)의 광성중학교(光成中學校)에서 1914년 간행한 「최신창가집」을 일제가 입수하여 보고하였다. 이 책 첫 작품이 ‘國歌’라는 제목으로 애국가 가사를 싣고 있다. 신한민보의 ‘국민가’와 유사하다. 다른 점은 제1절 ‘하나님이 보호하사’가 ‘한아님이 보우하사’로, ‘우리 대한 만세’를 ‘우리나라 만세’로, 3절의 ‘구름업시 놉고’를 ‘놉고 구름업시’로 변이시켰다. 그런데 "찬미가" 4절의 ‘님군을 섬기며’를 신한민보 ‘국민가’와 같이 ‘민족을 모으며’로 하였다. 이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신한민보 ‘국민가’가 소영자에서 불린 것이 전해진 것일 수도 있고, 반대로 소영자에서 국민가를 수용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6) 1916년 하와이 발행된 「애국창가집」 애국가 표지에는 ‘愛國歌’로 등사되어 있고, 목차 다음에 <애국창가집 서문>이 실려 있다. 판권의 간행일자는 1916년 5월 13일로 되어 있어 1915년 국내 한영서원에서 간행된 "창가집"을 바탕으로 편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가사 1절은 ‘하ᄂᆞ님이 보우ᄒᆞ샤’, ‘우리나라 만셰’로, 3절은 ‘구름업시 높고’로, 4절은 ‘님금을 섬기며’로 되어있다. 7) 1919년 "신한청년" 창간호 소재 애국가 1.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保佑하사 우리나라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기리 보전하세 2. 남산 우에 저 소나무 鐵甲을 두른 듯 /바람이슬 不變함은 우리 기상일세 3. 가을하늘 空闊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가슴 일편단심일세 4. 이 기상과 이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김규식 중심의 조직인 상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기관지 "신한청년" 창간호 속표지에 수록된 전 4절 가사이다. 각 절의 변이 상이 확인 된다. 이 가사는 이후 상해임시정부에 계승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기록이다. 이 잡지의 편집자는 주필 이광수이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안창호의 자문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본다. 제14장의 전승에 대해서는 이 기록을 주목하여 정리하기로 한다. ‘신한청년’에 게재된 애국가 가사의 변이는 2절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부 자구가 바뀌었다. 1절의 ‘보호’가 ‘保祐’로, ‘우리 대한 만세’가 ‘우리나라 만세’로, 3절의 ‘구름없이 놉고’가 ‘놉고 구름없이’로, 4절의 ‘님군을 섬기며’가 ‘충성을 다하야’로 바뀐 것이다. 오늘의 애국가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변이상 중에 ‘충성을 다하야’라고 바뀐 부분은 예사로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두 가지 점에서 그런데, 하나는 이 부분을 상해 임정 초기 안창호가 수정하였다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이 수정이 이미 1910년에 이뤄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임정시절 안창호와 가장 가까웠던 주요한이 "상해 임정 초기 안창호 선생이 수정하였다”고 주장한 대목이다. 그런데 이미 1910년 미주 신한민보 ‘국민가’에서 ‘충성을 다하야’로 수정되어 나온 다는 사실에서 상호 모순 관계에 있는 것이다. 결국 시기와 지역이 거짓이 되는 것이고, 이 혼란의 주체가 안창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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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금천전통문화예술대축제 ‘을묘원행’ 개최서울 금천구 금나래아트홀에서 다음 달 10일 제1회 금천전통문화예술대축제 ‘을묘원행’이 열린다. 26일 한컬쳐스는 다음 달 10일 오후 7시 30분부터 제1회 금천전통문화예술대축제 ‘을묘원행’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을묘원행은 국악인 박애리의 사회로 진행되며, 사물놀이 이광수 명인, 지휘자 강종화와 금천구의 중앙관현악단, 가야금병창 신윤아 등 국악계 최고의 실력파들이 참여한다. 이번 축제는 서울시에서 지원받아 금천구의 대표축제로 성장시키고자 기획됐다. 특히 구에 자리를 잡고 있는 한컬쳐스, 서울전통예술강사협동조합, 예운당 가야금병창보존회 등이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이들 대부분이 금천구의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의 졸업생이다. 이번 행사는 무료로 진행되나, 사전 예약을 해야 좌석권을 지정받을 수 있다. 신봉희 한컬쳐스 이사장은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의 졸업생들이 대학을 마치고 마음의 고향인 금천구로 다시 돌아와 지역 전통 문화예술의 발전에 기여 한다면, 다른 문화 예술활동의 모범 사례가 될 것”이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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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안창호 작사 애국가, “따로 있다”안창호의 글과 구술 자료는 ‘도산안창호전집’ 도산안창호전집, 총 14권, (사)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발행, 2000에 수록되었다. 이 중에 안창호의 세 가지 필명이 확인된다. 하나는 ‘산옹(山翁)’, 둘은 ‘섬뫼’, 마지막은 ‘애국생(愛國生)’이다. ‘산옹’은 주요한이 창간한 잡지 ‘동광(東光)’ 16호에 발표된 ‘合同과 分離’라는 글로부터 14회를 이은 글에 쓴 필명이다. 구술을 이광수가 윤문하여 발표한 것인데, 일제의 눈을 피해 내용 일부를 빼며("事勢不得이 빼 먹은 곳이 많습니다. 그리 알고 보아 주십시오”) 발표한 것이다. 이 잡지 1926년 11월호에 ‘山翁을 그리면서’라는 글을 통해 분명히 안창호의 필명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섬뫼’는 ‘島山’의 우리말 표현이다. 이 쓰임은 역시 ‘동광’ 1926년 6월호 외 세 편의 글에서 쓰인 것이다. 스스로가 썼다고 볼 수도 있고, 편집자가 발표자의 신변 보호를 하기 위해 쓴 것일 수도 있다. 마지막 ‘애국생’은 두 가지 자료에서 확인 된다. 1908년 ‘태극학보(太極學報)’ 3월호(제18호) 소재 ‘讚愛國歌’의 필자로 쓴 것으로, 이것이 안창호의 필명이란 사실은 ‘신한민보 新韓民報’ 1943년 11월 5일자 ‘애국지사의 노래’에서 확인이 되었다. 이 중 살피려는 것은 ‘애국생’이란 필명으로 안창호가 발표한 ‘讚애국가’이다. 그런데 이는 의미상 이미 존재하는 어떤 애국가를 기리는 뜻으로 지은 또 하나의 애국가인 셈이다. 이 작품을 수록한 ‘태극학보’는 1905년 일본 도쿄에 설립된 서북지방 출신 유학생들의 친목단체인 태극학회가 1906년 10월 창간호를 발행한 잡지이다. 처음에는 후배 유학생들의 편익을 도모하고 선후배간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점차 출판을 통한 계몽운동 기관지로 발전하여 국내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윤주(李潤柱), 문일평(文一平) 등의 의연금을 기본자산으로 하고, 회원의 의연금과 학보 판매금, 유지의 찬성금(贊成金)으로 발행하였다. 1907년 7월에는 175명의 인사들이 한꺼번에 의연금을 보내기도 하였다. 편집에는 김낙영·김홍량(金鴻亮)·김지간 등이 관여했다. 배포 지역이 넓었다. 일본, 서울 및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한 국내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의 공립신보사(共立申報社)를 통해 미주에도 배포되었다. 학보는 대개 논단·강단·학원(學園)·문예·잡보·기서(寄書) 등의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논단에는 국내 현실과 애국적인 논설을, 강단과 학원에는 계몽적인 학문의 소개를, 문예에는 문학작품을, 잡보에는 유학생의 활동과 국내외의 정세를 실었다. 국민계몽을 목적으로 한 만큼 계몽적인 학술내용과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 논설류도 많았다. 특히 제10호에 이원익(李源益)의 ‘愛國歌’ 등을 수록하여 발행 목적을 실현하였다. 또한 안창호에 대한 활동상을 수록하고 작품을 게재하기도 했다. 바로 ‘찬애국가’가 그 하나이다. 그렇다면 안창호가 이 ‘찬애국가’를 발표하게 한 원래의 애국가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윤치호의 ‘애국적 찬미가 제14장’, 즉 현 애국가로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1907년 초 귀국하면서 관심을 보인 것이 국가상징의 하나인 국가(애국가)였다. 그런데 이미 기독교계 학교를 통해 전파된 애국가가 있었던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함께 교육사업을 하고자 하는 윤치호 작사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윤치호 작사 애국가를 찬하며 자신의 애국하는 노래를 지은 것이다. 찬愛國歌(찬성시 하나님 가히로 同調) 愛國生 이상의 안창호(애국생) 작사 ‘찬애국가’는 두 가지 점에서 의의가 큰 작품이다. 하나는 1908년 2월 이전 기독교계 학교와 교회 등에서 부르고 있는 윤치호 작사 현 애국가의 존재를 안창호가 인정하였다는 사실이다. 둘은 안창호 역시 독립신문이 주도한 ‘애국가 지어 부르기 운동’에 늦게나마 참여하여 새로운 애국가를 지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결과는 의외로 안창호를 "애국가 작사자”로 오인하게 한 것이 된다. 이를 정리하면 이렇다. "안창호의 애국가 작사설의 원천은 1908년 3월 태극학보에 발표한 또 하나의 애국가인 ‘찬애국가’의 존재를 오인한 결과이다. 안창호 작사 애국가는 별개이다. 그러므로 현 애국가의 작사자는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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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대성학교,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지난 회에서 ‘한영서원’과 애국가와 관련 사항을 살펴 윤치호가 애국가의 작사자임을 밝혔다. 이번에는 역시 같은 시기 민족교육 학교인 안창호 설립 대성학교(大成學校)와 애국가 상황을 통해 작사자 문제를 짚어 보기로 한다. 대성학교는 1908년 9월 26일 개교하여 1912년 일제에 의해 폐교된 평양에 세워진 학교이다. 설립자는 안창호(安昌浩)이다. 평양의 김진후(金鎭厚), 선천의 오치은(吳致殷), 철산의 오희원(吳熙源) 등의 재정적 원조로 가능했다. 교육 방침은 ① 건전한 인격의 함양 ② 애국정신이 투철한 민족운동가 양성 ③ 실력을 구비한 인재의 양성 ④ 건강한 체력의 훈련 등에 두었다. 첫 입학생은 90여 명이었다. 이후 민족사학으로 알려져 입학 지원자가 500∼600여 명이 되는 때도 있었다. 교장에 윤치호, 대변교장에 안창호, 교무 책임에 장응진(張應震), 교사에 차이석(車利錫)·김두화(金斗和)·나일봉(羅一鳳)·장기영(張基永)·문일평(文一平)·황의돈(黃義敦)·최예항(崔叡恒)·유기열(柳祈烈)·김현식(金鉉式)·유진영(劉鎭永)·김진초(金鎭初)·이상재(李相在), 체조교사에 정인목(鄭仁穆)·이승설(李昇卨) 등이 근무하였다. 1910년부터는 장응진을 소장으로 한 하기 사범강습소를 부설하여 교사들의 재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909년 이 학교를 중심으로 여러 사립학교들이 일본 국기 불게운동(不揭運動)을 전개한 것이 사건이 되어 폐교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안창호는 이 사건과 105인 사건 등으로 곤란한 처지가 오게 되자 1910년 4월 ‘거국가(去國歌)’를 남기고 망명하였다. 학교는 1912년 봄 제1회 졸업생 19명을 배출하고 폐교를 맞았다. 이 학교는 윤치호가 초대 교장으로 안창호가 대변 교장이란 사실이 주목된다. 이 사실은 이광수의 기록에서도 확인 된다. 1927년 대중잡지‘東光’ 제10호에 쓴 ‘規模의 人-尹致昊 氏’라는 글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윤치호가 105인 사건에 피체된 것은 안창호씨와 지기상통(志氣相通)하여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설립 위원장이 되고 평양 대성학교 교장이 되었었다. 청년학우회는 조선 최초의 조직적인 정치적 결사라고 할 만한 신민회(新民會)의 별동대(別動隊)였고 평양 대성학교는 신민회의 3대 사업(정치적 결사, 산업진흥, 교육진흥)의 하나인 교육사업의 제1기 사업이요 아울러 본거(本據)였다. 이러한 사업에 수뇌(首腦)로 추대된 것이 이유가 되어 사내 총독 암살 음모사건에 수모자(首謨者)로 걸리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지기상통하여 대성학교 교장으로 활동하고, 신민회의 대표로 활동하여 사내 총독 암살 음모사건의 주모자로 형을 살게 되었다고 한 것이다. 결국 작사자 논란의 두 주역 윤치호와 안창호는 1905년부터 1910년까지는 지기상통의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안창호는 학교 운영상 명성이 높은 윤치호를 교장으로 모셔 학생 모집과 학교 운영상의 도움을 받는 것은 물론 해외 활동에 대비한 것이다. 개교식에 윤치호는 개교 환영사를 했고, 3여년을 재직하였다. 그런데 이 대성학교와 애국가의 관계도 주목이 된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의 애국가 작사자 조사를 계기로 드러난 사항이다. 먼저 1910년 대성학교에서 수학교사로 재직했던 채필근(蔡弼近/1885~1973) 목사의 증언을 살펴보기로 한다. 장로교 목사이며 신학자이다. 보기 드문 동경제대 출신의 엘리트 목회자로, ‘120년의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가장 해박한 지식인’이라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채필근은 평안남도 중화(中和)출신으로 1905년 숭실학교를 마치고 191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인 1910년부터 대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 기간에 안창호로부터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라고 들었다는 것이다. 1955, 4월 기독교 전문지 ‘신앙생활’에 발표한 글이다. "내가 25세 때에 대성학교(안창호 운영)에서 수학을 가르쳤지요. 그때 내가 도산 선생에게 ‘애국가는 본교 명예교장 윤치호 선생이 작사했습니다.’란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내가 황실가(皇室歌)와 태극가(太極歌) 등 옛 노래들을 평양서 해방 후까지 보존했는데 황실가와 애국가는 전혀 다릅니다. 내 기억력에 이상이 없다면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씨 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김인서 목사가 한국전쟁 중 들었던 것을 자신이 발행하는 종교전문지에 소개하여 알려진 사실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 작사자 규명작업을 벌여 대척 관계가 된 당사자인 ‘안창호는 윤치호가 작사했다고 밝혔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증언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윤치호의 1906~1907년 작사→1910년 국민회의 ‘국민가’ 채택→국민회의 애국가로 사용→1940년 임시정부, 국민회 안익태 애국가 신곡보 사용 허가→1945년 9월의 자필<가사지> 존재라는 맥락적인 흐름을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다음은 안창호의 생애와 흥사단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인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의 증언이다. 주요한은 '흥사단 맨'이다. 1920년 5월 14일 흥사단 입단식에서 이광수는 입단 번호 104번, 주요한은 105번을 받았다. 그리고 원동지역 회원으로 이광수가 1호, 주요한이 2호로 입단하였다. 임시정부 초기에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함께 했고, 해방 후에 흥사단을 재건하고 방대한 안창호에 대한 전기를 저술했다. 1963년 발행된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대성학교 시절의 일부이다. "대성학교 대리 교장으로 있던 도산이 하루는 서울에서 내려온 교장 윤치호를 보고 '성자신손 오백년은'으로 시작되는 애국가에서 '이 가사가 적당하지 아니하므로 고쳐서 부름이 좋겠으니, 교장께서 새로이 한 절을 지어 보시라'고 청했다. 이에 윤 교장은 '미처 좋은 생각이 아니 나니, 도산이 생각한 바가 있는가?' 하매 도산이 책상 서랍에서 미리 써 놓았던 것을 꺼내 보인 것이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되는 애국가 첫 절이었다. 윤치호는 즉석에서 그것이 매우 잘되었다고 칭찬하였고 도산은 '그러면 이것을 윤 교장이 지은 것으로 발표합시다'라고 하여 그 뒤부터 대성학교에서 새 가사로 부르게 되고 나중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대성학교 개교 후 안창호가 짓고,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발표하였다는 주장이다. 허술한 짜임새의 주장인데다 명의를 바꾸었다는 것은 오늘이나 당시나 두 사람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대성학교 설립과 '역술 찬미가' 발행 시점에서 오류임이 드러난다. 즉, 흥사단이 밝힌 대성학교 개교는 1908년 9월이다. 그러나 애국가인 ‘애국적 찬미가 14장’을 수록한 ‘찬미가’가 발행된 1908년 6월 25일이다. 더욱이 애국가가 1907년에 작사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러함에서 위의 '도산전서' 기록은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더욱 의외인 것은 주요한이 정 반대의 주장을 한 바가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주장을 하기 8년 전인 1955년 4월 19일자 경향신문 기고문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에서 주장한 것이다. "안도산이 지었다고 하는 것은 세간에 널리 유포되고 있는 설이지만은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신화적인 설이다. 도산이 작사자라고 하는 직접적인 증명을 가진 사람을 필자는 아직 만나지 못하였다. 또한 도산 자신의 입으로 그러한 말을 하는 것도 들어 본 적이 없다."이런 주요한의 입장 변화는 의외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후세인들이 어느 하나만 보고 편견을 가질 수가 있다는 것이 문제다. 결과적으로 첫 주장은 순수한 개인적 소신 표명일 것이나 후에 흥사단 업무를 맡으면서 압력에 의해 번복을 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 교사의 증언을 통해 "대성학교 시절 안창호가 윤치호 작사라는 말을 하였다”라고 확인하였다. 그리고 애국가가 수록된 ‘찬미가’가 6월에 발행되었는데, 그 2개월 후 대성학교에서 "안창호가 짓고 윤치호의 명의로 발표하였다”는 주장은 주요한의 왜곡이다. 결론은 "대성학교에서도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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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인쇄본 애국가 가사 전승 실상현 애국가의 전승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애국가 작사자 규명에도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연대와 출전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필사 자료보다는 인쇄본 자료를 통해 살필 필요가 있다. 필사본은 유일본일 경우 진정성 측면에서 가치가 있지만, 대개 사적 기록이란 점에서 필사 시점과 기록 배경이 명확하지 않다는 약점이 있다. 그런데 인쇄본은 단행본의 경우 판권을 통해서, 잡지나 신문은 발행 일자나 내용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다만 상업적 매체의 성격에 따라 게재 내용의 배경을 달리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약점이 있다. 그럼에도 인쇄본은 전승 년대, 즉 수직적 전승 과정을 명확히 알 수 있다는 점과 객관적 대비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채택하게 된다. 지금까지 확인되는 인쇄본 애국가 가사 자료는 대략 다섯 종 정도로 볼 수 있다. 첫 문헌 기록은 연활자본 1908년 재판 ‘찬미가’에 수록된 가사이다. 이 문헌은 현재까지 역술자(번역과 작사자)와 인쇄 연대가 명확하게 밝혀진 최초(最初)의, 최고(最古)의 문헌 소재라는 점에서 주목이 된다. 수록(인쇄) 시점, 작사자 기록 여부, 곡명의 차이, 표기법 문제를 중심으로 정리하기로 한다. 1. 1908년 재판 찬미가 제14장 4절 가사 이 판본은 1908년이란 시점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윤치호가 직접 ‘자필 가사지’를 통해 밝힌 ‘1907년 작사’ 후 재판 ‘찬미가’에 수록한 것이란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二 남산우헤 저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긔상일세 三 가을하날 공활한대 구름업시 높고 밝은 달은 우리가슴 일편단심 일세 四이긔상과 이 마음으로 님군을섬기며 괴로오나 질거우나 나라사랑하세 가사는 현대철자법으로 표기하였다. 舊철자법(국어정서법)이 아닌, 1937년 이후 쓰게 된 오늘날의 철자법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작사자 윤치호의 선각자적 역량을 보여주는 것으로, 자필 ‘가사지’와 함께 이미 철자법을 30여 년 앞서 ‘아래 아’같은 구(舊)철자를 쓰지 않은 것이다. 이 표기 문제는 1955년 애국가작사자 조사 때는 물론 최근까지도 제기되는 문제이다. 윤치호는 ‘독립신문’ 편집에서부터 ‘찬미가’ 발행 때까지 언문일치를 실현하여 ‘아래 아’ 같은 표기를 철폐하여고 띄어쓰기를 계몽하였다. 1907년 학부에서 7월 8일 개설한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에서 ‘ㅣ’와 ‘ㅡ’의 합음으로 ‘ㅏ’(阿)음과 같음으로 폐지하자는 주장을 하게 되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이 사촌 동생 윤치오(尹致旿)이다. 이 기관은 주시경과 지석영 등을 위원으로 구성하여 약 3년 동안 한국어 정서법 통일을 토의한 곳이다. 이 연구소 설립과 연구는 당연히 윤치호의 영향인 것이 분명하다. 당시 윤치호의 한글 사용과 그 표기에 대한 앞선 실천의지는 외무아문 참의로서 통역업무를 맡았던 시절의 한 회고에서 확인이 된다. 즉, 영문을 번역하거나 통역하는데 난삽한 한문을 쓰는 것보다 한글을 사용하는 것이 편리함을 안 것이다. "언문을 보급시킬 생각만은 간절하여 나라의 형편을 공사에게 자세히 보고하고 또한 언문을 보급하여야 조선 사람이 속히 깨이겠다는 뜻을 누차 진언하였다.” 당시 미국공사도 긍정하여 외무독판 김홍집에게 외교문서에 언문을 사용하자고 하였으나 "나는 조선 언문을 못 배웠소.”라고 강하게 거부하여 실천하지 못했다는 회고이다. 분명한 한글 사용론자의 면모이다. 이런 위치였음으로 1907년 한영서원과 뒤 이어 개교한 대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언문(諺文)이라는 일부 계층어를 일반 국민어(생활어)로 전환시켰고, 말하기와 쓰기의 일치, 즉 언문일치를 선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은 작사자 표기 여부이다. 이 ‘찬미가’ 재판 판권에서 "譯述者 尹致昊”로 나온다. 이 기록은 일부의 주장처럼 ‘번역자’로, ‘편집자’로, ‘감수자’로 해석을 하든 윤치호가 첫 인쇄 기록자란 위치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이후의 문건과 증언 등에서 "작사자 윤치호”로 말하고 기록하고 있다면, ‘역술자’에 대한 번역은 ‘譯’과 ‘述’, 즉 "일부의 번역과 일부의 지음”의 합성어로 보아야 제14장을 비롯한 2편은 작사로 보는 것이 옳다. 만일 살핀 세 가지 의미로 쓴 용어라면 각각의 용어가 더 간명하고 정확한 표기인데, 왜 실용주의자이며 한글 사용론자이기도 하고, 이런 용어를 쓰는 다른 나라를 유학한 인물이 이를 구분하지 못하여 함부로 썼겠는가. 2. 신한민보 수록 ‘국민가’ 4절 가사 이 자료는 1910년 9월 21일 자 미주지역 교민신문 신한민보 소재 ‘국민가’(윤티호작) 신문 활자본 4절 가사이다. 기사 내용의 전후 맥락으로 작사 후 3년 ‘찬미가’ 발행 2년 후라는 시점은 분명하다. 노래로든, 출판물에 의해서든 유포, 확산의 맥락이 확인된다. 여기에는 ‘애국가’나 ‘찬미가 제14장’이 아닌 ‘국민가’로 표기되었다. 당시 미주지역 교민단체이며 안창호가 선도하던 ‘국민회’의 단체가로 개명한 듯하다. 안창호이든 신문 편집자이든, 아니면 국민회 간부이든 간에 이 4절 가사를 인식하고 ‘국민회가’(國民會歌)로 개제(改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이 시기 ‘찬미가’를 텍스트로 했다면 이런 곡명으로의 전환은 가능한 것이다. 신한민보 수록 ‘국민가’ 4절 가사 1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대한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히 보전하세 2절 남산위에 저소나무 철갑을 둘은 듯 바람이슬 불변함은 우리기상일세 3절 가을하날 공활한데 구름 업시 높고 말근달은 우리 가삼 일편단심일세 4절 이긔상과 이맘으로 민족을 모흐며 괴로우나 즐거오나 나라사랑하세 가사는 ‘찬미가’와는 다르게 구(舊)표기법인 ‘아래 아’자를 썼다. 그리고 4절에서 ‘님군을 섬기며’(현 ‘충성을 다하여’)가 ‘민족을 모으고’로 개작되었다. 그러나 4절에서 ‘기상’을 ‘긔상’으로 1908년 ‘찬미가’와 같게 쓰고 있어 근본적으로 ‘찬미가’가 텍스트였음을 추정하게 된다. 이는 ‘찬미가’가 국내외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작사자를 ‘윤티호’로 명기했다. 매우 주목되는 기록이다. 왜 안창호가 주도하는 ‘국민회가’의 작사자로, 안창호가 모를 리 없는 신한민보가 이 4절 가사를 윤치호라고 했겠는가? 당시 미주지역에서는 안창호의 명성이 윤치호 못지않았다. 이는 윤치호가 명백한, 아니 굳이 이를 따질 필요가 없는 기독교적 애국가의 작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부에서는 이 노래의 보급을 위해 윤치호의 명성을 이용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데 이는 궁색한 변명일 뿐이다. 3. 1919년 ‘新韓靑年’ 창간호 수록 愛國歌 4절 월간 잡지 ’신한청년‘은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그 취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발행한 잡지이다. 1919년 11월 27자 임시정부 발행 ‘독립신문’ 1면에 신한청년당에서 월간 잡지 ‘신한청년’ 창간호를 12월 1일 자로 발행한다는 광고를 하기도 했다. 이는 임시정부와 그리고 독립신문과 같은 체제에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전체적인 집필과 편집은 이광수가 맡았다. 발행 주체인 신한청년당은 1918년 8월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동제사(同濟社) 단원들을 주축으로 조직한 한국 독립운동 단체로 한국 최초의 근대 정당으로 꼽힌다. 당수는 여운형이며 당원으로는 여운형, 한진교, 장덕수, 김철, 선우혁, 조동호, 안창호였으며, 1919년 4월에 서병호, 김구, 이광수, 신규식 등도 관여하였다. 일본·만주·연해주·서울 등 국내외로 동지를 파견하여 파리강화에 대표를 파견하였음을 알리고,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고, 나아가 국내외에서 거국적인 독립시위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들어서면서 1923년 신규식의 명령에 의해 자발적으로 해체되었다. 바로 이 당에서 발행한 기관지 ‘신한청년’ 창간호 제1면에 태극기와 함께 애국가 4절이 수록되었다. 1919년 ‘新韓靑年’ 창간호 수록 愛國歌 4절 1. 東海물과 白頭山이 마르고 달토록 하나님이 保佑하사 우리나라 萬歲 無窮花三千里 華麗江山 大韓사람 大韓으로 기리 保全하세(후렴) 2. 南山우에 져 소나무 鐵甲을 두른 듯 바람이슬 不變함은 우리 氣象일세 3. 가을하늘 空豁한데 높고 구름업시 밝은달은 우리 가슴 一片丹心일세 4. 이氣象과 이맘으로 忠誠을 다하야 괴로오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세. 특징적인 것은 가사에 한자를 썼다는 점이다. 이는 문사인 이광수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부르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이해를 위한 방식인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4절 "님군을섬기며”가 오늘날과 같은 "忠誠을 다하야”로 바뀐 것이 확인된다. 이는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일부의 주장처럼 안창호가 개작했다고 하는 부분이라 주목이 된다. 이 부분의 개작은 1919년 12월 이전에 이뤄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광수는 상해에 오기 전 일본 체류 시 조선유학생 총회에서 "새로운 윤치호 작사 애국가”를 부르게 된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상해에 와서는 3.1 독립운동사 등을 집필하면서 윤치호가 작사했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만일 안창호가 작사했다면 이 창간호에 "작사자 안창호”라고 표기하지 않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정황을 감안하면 이 기록에 작사자가 밝혀져 있지 않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보게 된다. 앞서서 살핀 임시의정원 회의 기록이나 김구 제 ‘대한애국가’ 악보에 반영된 입장이 이미 이 시점에 공유된 것임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즉, 작사자에 대해서는 일부에서 윤치호 작사 사실을 알고 부정적인 의사를 표하는 이들에게는 안창호 작사설을 내비치거나, 또는 아예 무응답으로 일관했다는 사실이다. 5. 안익태 작곡 ‘대한국애국가’ 악보 소재 2절 가사 세 번째 자료는 1935년 11월 안익태 작곡의 ‘대한국애국가’ 악보 소재 가사이다. ‘대한국애국가’(KOREAN NATIONAL HYMN, EA KOOK KA) 악보는 국한문과 영문으로 1935년에 발행되었다. 표지 1장과 악보 2장으로 합창 및 피아노 반주부로 구성되어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에서 발행했다. 신한민보가 주 판매처였다. 가격은 1부당 20센트이다. 1면에는 애국가 1절과 2절이, 2면 악보에는 후렴 가사가 인쇄되어 있다. 이 악보가 1940년 미주 대한인국민회에서 임시정부에 사용 허가를 신청할 때 동봉한 것이기도 하다. 1.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샤 우리 나라만세 2. 남산 위에 뎌 소나무 ㅅ덜갑을 두른 듯 바람 이슬 불변함은 우리 긔샹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히보젼하세(후렴) 이상과 같이 2절 만을 기록하고 있어 가사를 대비하는 자료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다만 역사적 의미에서는 악보 소재라는 점에서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다. 이 가사에는 ‘하샤’, ‘뎌’, ‘ㅅ덜갑’ 같은 구철자를 사용하였다. 이는 앞에서 살핀 ‘국민가’ 보다 늦은 시점임에도 구철자를 썼다는 점에서 ‘찬미가’를 참고한 것이 아니라, 구술을 옮긴 것이거나 구철자로 표기한 가사를 옮긴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악보에는 "안익태 작곡, 김준성 목사(John Starr Kim) 영역”이 표기돼 있다. 작사자는 밝히지 않았다. 이 역사적인 출판물에 작곡가와 함께 작사자를 표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애국가와 안익태’의 저자 김경래의 기록처럼 "안창호가 작사자라고 황사성 목사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면 악보의 완벽성을 위해서나 가치를 위해서나 이를 표기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더욱이 명색이 태극기와 애국가와 독립선언서로 3.1운동 시위에 참가하고, 일본에서 유학을 한 음악도로서, 더욱이 윤치호로부터 유학비 일부를 도움 받은 자로서 자신이 작곡한 가사의 작사자를 모르고 작곡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결과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안익태는 작사자를 모르지는 않았다고 보는 경우이다. 왜냐하면 정말 몰랐다면 ‘미상(未詳/Unknown)’이라고 표기하여 악보의 완벽성을 갖췄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악보 발행 후원체인 미주 한인단체와 신한민보 측의 의사를 반영한 결과로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만일 안창호가 작사자라면 이미 작고한 이후임으로 일제의 탄압을 염려한 조치라고는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윤치호라면 임시정부의 입장처럼 밝히지 않는 편이 보급이나 판매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을 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애국가’ 악보 소재 애국가 가사 4절 이 악보는 1945년 중국에서 발행된 김구 제 한국애국가(KOREAN NATIONAL ANTHEM)’이다. A調 4/4 Andante, 오선보와 숫자보를 병기한 악보는 '한중영문중국판(韓中英文中國版) 악보에 부기되었다. 중국 충칭(중경)에서 발행된 김구의 장서인과 친필로 표제를 쓴 표지 왼쪽에 ‘金九 題(김구 제)’와 ‘金九之印(김구지인)’이라는 인장과 김구 친필로 ‘一九四五 十月十八日’(1945년 10월18일)이 쓰여 있다. 뒷면 중앙에는 중사장(中山裝)의 김구 사진이 있고, 사진 아래쪽에서는 ‘한국애국가 고사(故事)’와 작곡자 그리고 번역자(중역/민석린, 영역/정한범)를 소개하였다. 악보집은 충칭의 ‘음악월간사(音樂月刊社)’에서 이사소(李士釗)가 편집, 발행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역사성과 변천 과정을 담고 있는 ’한국애국가‘에 법적 위상을 부여한 문건이다. 또한 법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경에서 발행한 마지막 출판물이며, 동시에 임시정부 주석 명의로 출판된 첫 공식 악보이다. 김구 제 ‘한국애국가’ 소재 4절 가사 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二 남산우에 저솔나무 철갑을 두른 뜻 바람이슬 불변함은 우리긔상일세 三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없이 밝은 달은 우리가슴 일편단심 일세 四 이긔상과 이 마음으로 정성을다하야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세 "이 애국가는 ①50년 전에 한 ②한국애국지사의 수필(手筆)로 창작되었는데, 이미 ③일명(佚名)해 버렸다. 처음에 서양 명곡을 채용하여 가사를 메워 노래를 불렀는데, 그 후 한국의 인사들이 안된다고 생각하여 10년 전에 ④한국 청년음악가가 새로운 곡조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곧 한국 건국운동 중에 국가를 대신하게 되었다.” 1945년 50년 전의 상황으로 말했다. 이를 풀이하면 50년 전으로서 ①1895년이다. 이 때 작사된 애국가의 작사자를 1919년 임시정부 수립초기 또는 악보를 발행하는 해방직전인 1945년 시점에서 ‘佚名’했다고 했다. ④작곡 시점을 10년 전이라고 했으니 1935년이 된다. 이 안익태 작곡 시점은 이 시기 우리로서는 알 수 없었던 시점이다. 국내에 알려진 것은 1981년 미주 교민 양주은이 ‘신한민보’ 40년 발행분을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함으로써 밝혀진 것이다. ②의 "50년 전”이란 표현은 정부와 독립협회의 공동 행사인 1897년 ‘조선개국 기원 505회’ 기념식에서 윤치호가 동일 후렴의 ‘무궁화가’가를 발표한 시점과 1년 차이이다. 그리고 ‘수기’란 공식 문서로 발표한 것이 아니라 ‘사적인 작사’라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일치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윤치호가 독립협회 또는 서재필의 요청으로 행사를 위해 준비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이 시기 윤치호는 분명 ‘한 한국애국지사’였음으로 일치하는 표현이다.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창하며 외부와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발간에 적극 참여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③의 ‘일명’이란 표현은 주의가 요구된다. 윤치호는 1915년 2월 13일 ‘105인 사건’으로 영어(囹圄)의 몸에서 특사로 출감하며 ‘매일신보’와의 인터뷰에서 일제에의 협조 의사를 내비쳤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을 실망시킨 시점에다 이후 4년 후인 1919년 ‘3.1운동’ 직후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수립되면서 윤치호의 망명(亡命) 내지는 동참(同參)을 요청한 바 있었으나 응하지 않아 크게 원망을 하게 된 시기이다. 정리하면 "김구의 이 기록은 윤치호 작사 동일 후렴 ‘무궁화가’또는 ‘찬미가 제10장’ 작사 사실을 애국가의 시원으로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하여 단지 작사자를 ‘일명’했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상에서 1908년부터 1945년까지 발행된 인쇄 자료에서 곡명, 작사자 표기 여부, 가사의 변이를 살폈다. 그 결과 주목하는 작사자 표기 여부에 대해서는 네 가지 형태로 나타났음이 확인되었다. 하나는 1908년 발행 재판 ‘찬미가’의 경우 윤치호를 ‘역술자’로, 둘은 1919년 신한민보 ‘국민가’ 기록으로 윤치호 작사로 명확히 밝혔다. 셋은 작사자를 ‘미상’ 등으로도 표기하지 않고 아예 밝히지 않은 경우이다. 1919년 ‘신한청년’ 창간호와 1935년 안익태 악보의 경우이다. 마지막은 1945년 중국에서 발행된 ‘김구 제 대한국애국가’의 ‘일명(佚名)’ 표기이다. 그런데 ‘찬미가’의 ‘역술자’ 중 ‘술’은 윤치호의 작사를 반영한 것이고, ‘국민가’는 윤치호를 작사자로 표기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적어도 안창호 작사는 아니다”를 명확히 한 것으로,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역설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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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제5회 안창호의 윤치호에 대한 배려’에 대한 脚注"선생이 작사하였지요 라고 물으면 웃고 답하지 않았다.”는 안창호가 자신이 작사라는 사실을 내 세우지 않는 겸손함을 표한 것이다.” 이 ‘겸손’의 표현은 사실일 수 있다! 필자는 4회를 쓰고 나서 많은 시간을 위의 문장을 되뇌었다. 이광수가 한 말이든,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가 가필한 것이든, 이 겸손의 표현이 사실이라면, 나는 30여년을 역사를 배신한 것일 뿐만 아니라 안창호설 주장자들을 향해 독설을 내뱉었다. "안창호 선생을 욕되게 하지마라. ‘거짓을 말하지 마라’란 선생의 말씀을 명심하라!” 어떻게 수습해야 하느냐로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거의 3주 정도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5회 분 보내주세요.”라는 편집부의 성화를 들을 때마다 되뇌기를 되풀이 하였다. 모진 말이나 독한 말을 하고는 혼자 전전긍긍하는 내 성정대로 마음을 쓰고 또 썼다. 그러던 어느날, 출근길 전철 안에서 의외의 경험을 하고 생각을 되 돌릴 수 있었다. 그것은 지난 해 입었던 옷 주머니에 있던 이쑤시개에 약지 손가락을 찔린 일이었다. 순간,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사자성어를 떠올렸다. 필자 나름의 이 말의 해석은 이렇다. "주머니 속의 뾰족한 것은 언제든지 뚫고 나 올 수밖에 없다” 작사자가 윤치호든 안창호든 사실이라면, 그 증거는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그리고 되돌아가 우연스럽게 또는 지인의 도움으로 받은 자료들은 떠 올려 보았다. 청계천 헌책방에서, 인사동 고서점에서, 방송 다큐맨터리에서, 해외 싸이트 경매품에서, 그리고 국가상진연구회 회원이 건네 준 자료들에서, 각 설 주장 가문(家門)에서 공개한 자료들을 속에서 드러낸 것들이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들은 말 그대로 스스로 존재를 드러낸 것들이다. 예컨대 애국가 역사에서 문제적 시기로 볼 수 있는 1907년을 전후하여 생산된 자료들이 그것들이다. 다음의 네 가지를 대표적인 자료로 꼽을 수 있다. 하나는 ‘1907년 作’으로 표기된 ‘윤치호 자필 가사지’의 존재이다. 둘은 1908년 태극학보 2월호 애국생(愛國生/안창호) 명의 ‘贊愛國歌’의 존재 확인이다. 셋은 1908년 윤치호 역술 재판 <찬미가>의 존재다. 넷은 1910년 9월 21일자 신한민보 게재 <국민가> ‘윤티호’ 표기 자료이다. 이상의 네 가지는 직접적으로 애국가의 작사자는 윤치호라고 가리키는 자료이다. 특히 두 번째 자료는 안창호가 작사한 ‘애국가’의 존재가 확인 된 것이니, 이와는 가사가 다른, 즉 현 애국가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를 예찬(禮讚)한 것이니 결과적으로는 1907년 작사한 윤치호 작사를 인정한 것이 되는 자료이다. 네 번째 자료는 매우 의미심장한 자료이다. 왜냐하면 이 번 회의 주제인 ‘안창호의 겸손(謙遜)’ 주장을 상쇄(相殺)시키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부연하면 실질적인 안창호 주재의 신한민보가 애국가와 가사가 같은 4절을 <국민가> 곡명을 바꿔 윤치호 작사로 발표한 것은 앞의 ‘겸손’ 주장과는 상치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와 이에서 확산된 단순 기록을 제외한 모든 자료는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향한다는 점에서 안창호설은 페기 되어야 하는, 풍화(風化)를 겪는 낭설임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로서 제5호로 제시한 ‘안창호의 윤치호에 대한 배려’에 대한 脚注를 뒤늦게 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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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해악(害惡)'안창호 작사설'의 발단은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에서 비롯되었다. 임시정부와 그 요인들, 특히 안창호나 김구, 이승만, 그리고 이 책의 저자 춘원 이광수는 이미 작사자가 윤치호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책의 실제 저자 이광수로서는 '안창호 작사'임을 시사하는 내용을 기술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는 저자 이광수라는 이름을 빼고 안창호 작사설을 가필하여 끼워 넣었다. 이 사실을 ‘도산 안창호’ 각 판을 대비하여 가필 사실을 밝힌 필자는 제6회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내용 불신’에서 "안창호설은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한 바가 있다. 이런 저간의 사실을 모르는 독자들이나 특히, 1955년 문교부나 국사편찬위원회 같은 곳에서는 이 책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하여 혼란을 야기했다. 대표적 사례가 1955년 미국 출판사의 문의에 문교부가 "안익태 작곡 안창호 작사”로 답하려 했다는 사실과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에 이 책의 일부를 인용한 것들이다. 큰 해악을 일으킨 책이다. 이번에는 이에서 확대된 문제, 즉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에 수록된 이광수 가족과 윤치호 가족 간의 주장을 살피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두 가족 간의 서로 다른 주장은 근본적으로 이 책의 임시정부 시절 안창호의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인도 하지 않았다”라는 기록에서 야기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1955년 5월 13일 국사편찬위원회는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 회의 참고자료로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를 발행했다. 이 보고서에는 ‘도산 안창호’에서 인용한, 또는 관련한 사항이 네 곳에 이른다. 또한 윤치호에 대한 내용이 가장 많이 기술되어 있는데, 이 중에는 안창호 대(對) 윤치호 두 가족이 ‘도산 안창호’의 내용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분명하게 대척되는 대목이다. ‘안창호 작사설’은 8쪽에서 11쪽에 기술되었다. 이 중에 문제가 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춘원이 도산 전기에 애국가의 작사자를 도산이라고 쓴 것에 대해 윤치호 씨의 자제가 문의했을 때 춘원이 그 유래를 설명하자 납득하고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도산 안창호’를 보고 찾아온 윤치호 자제에게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許英肅, 1897~1975)이 하였다는 말이다. 부연하면 "이 노래가 널리 불려서 국가를 대신하게 되어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애국가는 선생이 지으셨다는데’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도 아니 하였다.”는 등의 대목이 있어 윤치호 자제(3녀 문희로 추정됨)가 문제를 삼자 이광수가 설명하자 이해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전후 맥락을 짚어 구체화하면 이런 문제가 부각되기에 이른다. 즉, 1945년 해방이 된지 2개월 후쯤이고, 작고 2개월 전에 딸 문희가 부친을 만난 자리에서 다르게 불리는 부분이 있어 고치고, 친필로 가사를 친필로 받은 바가 있다. 곧 ‘자필 가사지’를 말한다. 3녀 문희와 2녀 보희(이화여대 음대 교수)와 함께 1970년대까지 부친이 작사자임을 증언한 장본인이다. 이런 사실을 대입할 때 과연 봉선사에 있던 1947년 1월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로부터 의뢰를 받아 5월에 출간한 이후, 이광수는 1949년 1월 반민특위 조사, 수감 등을 거처 1950년 7월 12일 납북 당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내왕하여 따졌다는 것이니 믿기가 어렵다. 특히 이 책이 발간되기 전인 1946년 5월 허영숙과 이혼을 한 상황인데, 이후 허영숙이 말했다는 것을 믿어야 할지 의심스럽다. 다음 인용문은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 18쪽에 있는 주영환의 서면 답변 일부이다. "이광수의 도산 전기에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 씨라고 한 것은 이광수의 실책이다. 안영자 씨를 통해 정정할 기회를 만들기로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하나의 사안에 대해 ‘납득’과 ‘정정’이란 상반된 주장을 한 것임을 확인 한 것이다. "작사자를 안창호씨라고 한 것은 이광수의 실책이다”, "정정할 기회를 만들기로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는 이광수가 1950년 7월 12일 납북을 당한 상황이니 1947년 6월부터 방문하여 따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1948년 중반부터 반민특위(反民特委)에 시달리던 상황을 감안하면 이 방문 기간은 더 단축되어 의심이 든다. 이런 상황이기에 양측 주장 모두 증거력을 인정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결국 이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가족들의 증언은 영원한 평행선일 수밖에 없다.(그러므로 기록 자료가 아닌 가족들의 구술 자료는 참고 자료일 뿐이다) 두 주장의 내용 자체도 구체적이거나 논증적이지 않아 각 주장 중에서 반드시 하나를 택해야 할 가치가 없다는 결론이다. ‘애국가작사자조사' 10쪽의 허영숙 주장과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 18쪽의 주영환의 주장은 모두 신뢰를 할 수 없다. 가족이나 인척의 주장이기 때문이기도 한데, 한 보고서에 상치되는 주장이기에 상쇄되는 주장이다. 결론적으로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에는 윤치호 작사설은 존재하지만 안창호는 ‘설(說)’은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작사자 조사’라는 소란은 근원적으로 문제를 야기한 ‘도산 안창호’의 해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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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기획행사...'김묘선 명인의 인연'국가무형문화재 승무 전승교육사 김묘선 명인과 제자들이 공연을 올린다. 김묘선 명인은 국내외 무대를 넘나들면서 지속적으로 '승무'를 전승 및 확산 해오고 있다. 김묘선 회장은 "승무는 변천 과정을 거쳐오는 동안 지역마다 특징이 다양하게 전승되었다. 이번 공연은 '이매방류 승무'의 원형 보존 및 '승무' 본연의 멋을 지키기 위해 온전한 '승무'를 선보인다"라고 밝혔다. 또한, 전통문화를 통해 영감을 얻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발전시켜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기반을 마련하고 우리 춤을 확산시키고자 기획되었다. 이번 공연에서 김묘선 명인의 해외 제자들과 한국제자들이 함께 승무, 살풀이춤,영남덧배기춤, 노현식 안무의 매화잠, 국수호류의 화랭이춤, 김묘선류의 소고춤 등 다양한 종목을 선보인다. 특별출연으로 사물놀이 이광수 명인의 '비나리'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판소리 '심청가' 보유자 송재영 명창이 '춘향가' 중 '오리정 이별' 대목을 선보인다. 공연은 오는 6월 24일 국가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 민속극장 풍류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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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내용 불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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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안창호의 윤치호에 대한 배려임시정부 시절 김구나 안창호는 애국가 작사자로서의 윤치호를 비난하거나 매도하지 하지 않았고, 오히려 배려했다는 점을 지난 회에서 확인했다. 그렇다면 그 배경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사실을 더 강화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필자는 2015년 12월 31자 통신사 뉴시스 ‘윤치호 애국가 작사 확정 조직적 방해세력 누구’에서 1947년 발행된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저자 표기 문제나 내용상의 가필 흔적 등을 들어 애국가 언급 부분의 신뢰성을 지적한 바가 있다. 특히 ‘상해시대편’의 수정 문제와 작사자를 묻자 ‘대답하지 않았다’는 부분은 아예 편집 과정에서 가필한 것일 수도 있다는 주장까지 하였다. 그리고 진난 4회에서 대답하지 않은 이유를 세 가지로 분석했다. 그런데 세 번째 이유로 안창호가 윤치호에 대한 배려가 있었다는 것을 제시했는데,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있다. 이 문제는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라고 보아 이번에 다시 살피기로 한다. 김구는 애국가 작사자를 ‘50년 전 한 대한 애국지사’라고 표현하였다. 안창호는 당신이 지었지요라고 묻자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도 아니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두 사람의 표현에는 윤치호에 대한 배려가 배어있다. 왜냐하면 내가 아니고 윤치호다라고 답하게 되면 묻는 이의 의도대로 어떤 형태로든 윤치호의 부정적인 행적을 언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행적은 당연히 개인뿐만 아니라 애국가에도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다. 즉, 1948년 음악평론가 박은용(朴殷用/1919~1985, 1949년 월북)이 동아일보에 발표한 ‘애국가考’에서 "윤치호 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를 무시하고 거짓으로~”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바로 이런 구구함을 피하기 위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것이니, 분명 배려한 것임이 틀림없다. 이런 배려의 배경은 무엇일까? 다음과 같은 이광수와 윤치호 간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면 유추가 가능할 것이다. 이광수가 안창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허영숙과 임정을 떠나 귀국하여 쓴 글 중에 1927년 대중잡지‘동광(東光)’ 제10호에 쓴 ‘規模의 人-尹致昊 氏’가 주목을 끈다. 여기서 윤치호가 105인 사건에 피체된 것은 안창호와 깊은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며 이렇게 밝혔다. "안창호 씨와 지기상통(志氣相通)하여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설립위원장이 되고 평양 대성학교 교장이 되었었다. 청년학우회는 조선 최초의 조직적인 정치적 결사라고 할 만한 신민회(新民會)의 별동대(別動隊)였고 평양 대성학교는 신민회의 3대 사업(정치적 결사, 산업진흥, 교육진흥)의 하나인 교육사업의 제1기 사업이요 아울러 본거(本據)였다. 이러한 사업에 수뇌(首腦)로 추대된 것이 둘째 이유가 되어 사내 총독 암살 음모 사건에 수모자(首謨者)로 걸리었던 것이다.” 1911년 105인 사건 전후 안창호와 뜻을 같이하는 사이라는 것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진술로 이어갔다. "좀 더 큰일을 할 수 있는 명망과 재능과 재산과 지위를 가지고서도 일신의 안락(安樂)에만 탐(耽)하여 세사를 잊어버린 사람이라 씨를 비난하였다. 나도 그러한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러다가 기미년 간에 내가 상해에 유랑을 할 때 씨의 예전 동지이던 안 씨(안창호-필자)를 만나 ‘윤 씨는 전전긍긍(戰戰兢兢)한 수성(守成)의 인물일지언정 그가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을 위하여 일하려 하는 지(志)와 성(誠)을 나는 굳게 믿노라’라고 누누이 역설(力說)함을 듣고 나와 및 나와 같이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다시 씨에 대하여 존경과 정중(鄭重)을 갖게 되었다.” 작가 이광수가 윤치호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 계기가 임시정부 초기 안창호가 윤치호에 대해 힘주어 말하는 것을 듣고 나서라고 했다. 이는 애국가 작사자로서의 윤치호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고 본다. 또한 적어도 1920년부터 이 글을 쓴 1927년까지는 이광수가 견지한 윤치호관이라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이것으로서도 이광수와 상호 배려의 관계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윤치호 일기’에는 이 시기 이후의 관계에서도 유지되었음을 알게 된다. 일기 1932년 4월 30일조를 보면, 29일 상해에서 안창호가 윤봉길 의사 사건으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결코 연루되었다고 믿지 않는다.”고 애통하였다. 그리고 서울 송치 19일 후인 6월 22일 수요일 밤 9시 30분에 경무국 경시(警視) 미와(二輪; 안창호 취조 담당 형사)가 자신을 찾아와 유치장에서 한 사람을 치과 치료차 병원에 데려갔다 함께 왔다고 했다. 함께 온 이가 바로 안창호였다고 썼다. "유치장 생활로 너무 변한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 오랜만의 만남이 있은 10일 후의 일기에는 또 이런 기록이 있다. "7월 11일 이광수가 찾아와 안창호가 사법 당국에 인계되면 상당 기간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여 건강이 크게 우려된다는 것으로 책임자인 다나카 경무과장을 만나 달라는 부탁에 약속을 했다. 7월 12일 화요일 아침 8시, 다나카 경무국장을 만났다. 친지를 대표하여 조건부 석방이 가능한지 물었다. 7월 15일 4시 반 이광수의 요청으로 안창호를 면회하였다.” 서울로 압송되어 39일간 취조를 받고, 1932년 7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 송치되는 상황이다. 이 기록에서 이광수의 역할이 확인되는데, 윤치호에 대한 신뢰가 묻어있다. 그런데 윤치호의 이러한 안창호에 대한 배려는 이광수와 말도 하지 않는 유억겸․신흥우․김활란 등으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았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내가 안창호와 이광수 같은 서북파 지도자들과 진솔한 우정을 나누고 있는데 대해 기분이 상한 것 같다. 그러나 사적인 우정과 정치적 당파심은 엄연히 별개의 문제다.” 후에 밝혀졌지만 이 사건의 안창호 보석금은 윤치호가 댔다. 그리고 1938년 전후의 치료비도 여러 차례 내주었다. 이런 사실은 흥사단 기관지 ‘기러기’에 마지막 병상을 지킨 이갑(李甲)의 딸 이정희가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여러 인사를 접촉하는 과정에서 안창호가 윤치호에게는 신세를 많이 졌으니 가지 말라고 했다는 증언 등에서 확인된다. 결국 안창호의 말년까지 관계가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결론은 이렇다. 이상과 같은 도움이 있었다고 해서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가 양보했거나 이 때문에 윤치호가 금전적 도움을 주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둘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이다. 단지 인간적인 신뢰가 굳건하였으므로 그 과정에서 상호 배려가 있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당연히 여기에는 애국가와 그 작사자에 대한 경의(敬意)가 표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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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안창호가 답하지 않은 이유, 윤치호가 작사자이기에애국가 작사자 문제에서 임시정부의 입장과 요인들의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첫 회에서 ‘임시정부공보 애국가 수정안’, ‘김구선생제 한국애국가’ 악보, 그리고 김구의 발언 등을 살폈다. 이번 회에서는 안창호의 발언으로 알려진 1947년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명의의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기록을 살피기로 한다. 작사자가 누구이냐고 물었더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는 대목이다. ‘도산 안창호’는 초판부터 3판까지는 저자가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로 되어있으나 실제는 이광수 저작으로 알려졌다. 이광수의 해방 후 첫 번역서 ‘백범일지’가 선풍을 이르키자 기념사업회가 의뢰하여 썼다고 하는데, 1949년 재판 발행, 1953년 한글 3판 발행, 1978년부터는 ‘흥사단’ 명의로 발행, 이후 ‘춘원 이광수’ 명의로 발행되었다. 이 책 제6장 ‘상해시대 편’(3판 기준) 중 다음의 세 단락이 논란의 대상이다. "정청(政廳)은 매일 아침 사무 개시 전에 전원이 조회를 하여 국기를 게양하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하는 애국가를 합창하였다. 도산은 그 웅장한 음성으로 힘을 다하여서 애국가를 불렀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점잔을 빼던 사람들도 아이들과 같이 열심히 부르게 되었다. 애국가 끝 절에, ‘이 기상과 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세’하는 것은 ‘이 기상과 이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세’라고 도산이 수정하였다. 원래 이 노래의 시방 부르는 가사는 도산의 작이거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려서 국가를 대신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애국가는 선생이 지으셨다는데’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도 아니하였다. 정청을 정제(整齊)하는 외에 큰일은 독립신문 발행과 민족운동 거두(巨頭)를 일당(一堂)에 모으는 일이었다.” 첫 단락은 임시정부 청사에서 아침 업무개시 상황으로 안창호를 비롯한 전원이 국민의례를 마치고 업무를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두 번째 단락은 안창호가 애국가 2절 ‘임금을 섬기며’를 ‘충성을 다하여’로 고쳤다는 것과 누가 지은 것인가를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 번째 단락에서는 안창호의 주 업무가 민족 지도자들을 만나 설득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 중 문제가 되는 것이 두 번째 단락의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원래 이 노래의 시방 부르는 가사는 도산의 작이거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려서 국가를 대신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애국가는 선생이 지으셨다는데’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도 아니하였다.” 이 대목은 전거(典據)가 없다. 단지 임시정부의 ‘상해시대’라고만 했는데, 일반적인 기산으로는 1919년부터 1932년까지를 말하지만, 이 책의 저자가 이광수라면 그가 상해에 있던 1919년부터 1921년 사이를 말하게 된다. 그런데 이 내용은 이후 몇 개의 버전으로 확산되어 유포되었다. 1950년대부터 70년대 사이 전개된 몇몇 상황은 다음과 같다. "상해 계실 때에 학생들이 애국가를 선생이 지으셨다지요 물으시면 肯定도 不定도아니 하시고~”(1950, 강제환, 安昌浩 雄辯全集, 143쪽) "愛國歌를 안 先生님께서 창작하였습니까?고 仰問함에 대하여 선생은 아무 대답도 아니하셨다.(채필근, 신앙생활, 1955, 합병호) "항간에서는 도산이 지었다고 믿는 이가 많으나, 상해시대에 ‘이 노래는 선생님이 지으셨지요?’하고 도산에게 물으면, ‘웃고 대답이 없었다’는 것이다.”(주요한, 1971, 安島山 全書, 993쪽) 모두 네 가지에서 공통되는 것은 안창호에게"선생이 지었지요”라고 물었다는 것과 이에 대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는 구조다. 이 상황은 주어가 생략된 형태이지만 지난 3회에서 살핀 김구의 발언과 같은 취지다. 즉, 김구가 상해 임정시절 愛國歌 작사자가 누구인가를 묻는 동지에게 "우리가 3.1 운동 때 태극기와 愛國歌로 싸웠는데, 누가 지었는지가 왜 문제인가?”라고 한 것을 말한다. 한 마디로 취지와 구조가 같다는 말이다. 이상을 통해 볼 때 1920년 전후 임시정부에서 딱히 설(說)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작사자를 안창호인줄로 알았는데 실제는 윤치호라는 것에 대해 논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를 전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단순하게 답을 안 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면, 구조상 긍정으로도, 부정으로도 해석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윤치호 작사를 전제로 안창호에게 이를 부인하는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이다. 그래서 대답이 없음은, 또는 대답하지 않았음은 곧 윤치호가 작사자라고 긍정한 것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 하나는 자신이 작사하지 않았기에 기대하고 묻는 이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고, 둘은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사실대로 말하면 부르지 않겠다는 반발을 우려해서이다. 그리고 사족을 단다면 다른 길을 걷는 윤치호에 대한 배려의 뜻도 담았다고 보는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상술한다.) 그런데도 굳이 이를 ‘안창호가 자신이 작사라는 사실을 내 세우지 않는 겸손함을 표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앞에서 제시한 세 가지 이유가 없다면 이런 해석을 할 수고 있다. 그러나 굳이 겸손을 표할 이유가 있겠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일부 문제를 제기한 바가 있었다. 바로 대성학교 수학교사로 재직하여 교장 안창호를 잘 알고 있는 채필근(1885~1973) 목사가 ‘신앙생활’ 1955년 합병호에 비판을 한 바가 있다. "만일 안 선생이 創作하셨다면 直言하셨을 것이다. 誠一貫의 안 선생이 歷史의 大 文字에 대하여 謙讓의 沈黙이 있을 수 없다.” 사사롭지 않은 애국가 문제에 겸양(謙讓)을 표한다는 것은 안창호 답지 않다고 했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의 분석이니 더욱 그렇다. 이는 안창호와 함께한 이들이나 임시정부 초기 애국가 상황을 아는 이들은 결코 작사자를 안창호로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임을 알게 한다. 이제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에 있는 문제의 대목에 대한 결론을 맺고자 한다. "상해 임시정부 초기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 인가, 아니면 안창호 당신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안창호는 답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자신이 작사하지 않았음을 밝혀 실망을 줄 필요가 없었고, 윤치호라고 사실대로 말하여 반발을 살 필요도 없었다. 또한 다른 길로 가지만 105인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윤치호를 배려를 한 결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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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구의 애국가 사연, “작사자는 윤치호다”"1945년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그 측근들은 애국가 작사자를 알고 있었다. 작사자는 바로 윤치호이다. 다만 윤치호를 작사자로 내세우지는 않았고, ‘50년 전 한 한국 애국지사’로 지금은 ‘숨은 이름’이라고 하여 적대시하지도 않았다.” 지난 제2회 ‘김구는 애국가 작사자를 알고 있었다’의 결론 부분을 인용하였다. 이번 회에서도 이를 전제로 임시정부 요인들의 작사자 인식을 확인하기로 한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애국가 작사자를 누구로 알고 있었는가를 살필 수 있는 에피소드가 두 가지 있다. 내용은 대동소이한데, 하나는 기독교 감리교계에 전해지는 김구의 발언이고 또 하나는 상행 임정에서 독립신문 등의 업무를 맡았던 이광수가 전(轉)한 것이다. 전자를 먼저 살피면 대략 이렇다. "김구선생이 상해 임정시절 愛國歌 작사자가 누구인가를 묻는 동지에게 말했다지요. ‘우리가 3, 1운동을 태극기와 愛國歌로 싸웠는데, 누가 지었는지가 왜 문제인가? 혁명이 완수될 때까지는 문제가 될 수 없소’라고 했다지요” 감리교 신학대학 역사박물관 전 관장 윤춘병(尹春炳/1918~2010) 목사의 전언이다. 유사한 내용이 2013년 ‘애국가법 제정 왜 필요한가?’(한국입법학회 연구보고서) 등에 수록된 내용이기도 하다. 김구의 단호함이 밴 발언으로 상해 인시정부 초기의 상황이다. 이런 입장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지사들의 입장으로 "적군의 무기와 식량을 빼앗아 싸우는 상황에서 이런 논란은 분열이다”라는 인식이 있었던 결과이다. 그렇다면 작사자를 묻는 의도와 이렇게 답변을 했어야 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인용한 결론의 맥락에서 해석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임시의정원회의 등에서 열정적으로 애국가를 부르는 안창호를 작사자로 알았는데, 정작은 윤치호라는 소문이 있어 이를 김구에게 물은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을 받은 김구는 ‘이다’, ‘아니다’라는 답변 대신 조국을 떠나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처지에 누가 작사했는가를 따질 필요가 있는가라고 답한 것이다. 적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로 적과 싸우는 상황에서 이 무기가 누구의 것이냐를 따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굳이 이 상황의 진의를 따진다면 이렇다. 묻는 이가 바라는 안창호가 아니라 유감이지만 윤치호라는 것이 된다. 이는 지난 회에서 도출한 임시정부 요인들의 인식 기조임을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이런 정황의 연장선상에서 김구와 애국가의 관계가 의외로 곡진(曲盡)한 면도 있음을 알게 된다. 제시하는 사연은 김구 생애의 가장 감격적인 순간이라 할 수 있는 1945년 해방을 맞아 고국으로 환국하는 상황의 애국가 사연이다. 이 감격을 장준하(1918~1975)가 1971년 발행한 ‘돌베개’에 수록하였다. "누군가가 조선 해안이 보인다고 소리쳤다. 일동은 ‘우아’ 하고 일어나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보인다! 저기 동북 편 손아래 조그맣게 그리고 희미하게 고국의 땅이 나타나고 있다. 저것은 바로 우리 땅인 것이다. 누구의 지휘도 없이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가 울려 나와 합창으로 엄숙하게 흘러나왔다. 비행기 속 공기를 흔드는 노랫소리는 어느덧 울음 섞인 노래가 되었다.(중략) 애국가는 우리들의 심장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조국을 주먹 안에 움켜잡은 듯이 떨게 했다. 드디어 애국가는 끝까지 부르지 못하고 울음으로 끝을 흐렸다. 울음 섞인 합창, 그것이 그때의 나의 가슴속에 새로 지어진 애국가다. 기체 안의 노 투사는 마치 어린이처럼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을 달래지도 못했다. 그 어느 누가 이 애국가를 울지 않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 노래를 부르는 입모양인지, 웃음을 억누르는 모습인지, 분간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발음을 못하고 입술을 깨무는 노 혁명가의 감격. 감상을 내어버린 지 오래고 울음을 잊어버린 지 이미 옛날인 강인한 백범선생, 그의 두꺼운 안경 알도 뽀오얀 김이 서리고 그 밑으로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번져 흘렀다. ‘조국을 찾고 눈물도 찾으셨구나’ 나는 마치 한 소년처럼 여울지는 가슴을 느끼며 어깨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환국의 감격, 눈물로 부르는 애국가 합창. 임시정부의 애환을 상징하고 있다. 이 글을 통해 김구의 애국가에 대한 경의를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윤치호를 임시정부 내내 ‘한 대한 애국지사’로 예우를 견지한 배경이다. 제3회 ‘ 김구의 애국가 사연, "작사자는 윤치호다”의 결론은 이렇다.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사실에 반감을 갖고 묻는 이들에게 한 김구의 답변을 이렇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주는 애국가의 작사자는 50년 전의 ‘한 대한 애국지사’이다. 이것을 왜 문제 삼는가라는 반문이다. 묻는 이들에게는 우회적으로 알리며 설득한 것이고, 작사자에 대해서는 나름의 배려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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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구는 애국가 작사자를 알고 있었다"임시정부는 애국가 작사자로 안창호를 염두에 준 바가 없다. 그리고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알면서도 드러내 거론하지 않았고, 다른 길을 걷는다고 매도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 기조를 견지하였다.” 지난 제1회 ‘임시정부 안창호 작사, 인식 없었다’의 결론 부분을 인용하였다. 임시정부의 이 기조를 이해하지 못하면 해방 후 출현하는 자료에 대한 해석을 할 수가 없다, 즉, ‘金九先生 題 大韓愛國歌’ 악보 해설 부분이나, 1947년 이광수 저술 ‘도산 안창호’의 ‘소이부답(所以不答)’ 대목이나, 1948년 박은용의 동아일보 ‘윤치호의 작사 사실’ 기고문이나. 문제의 1955년 미국 출판사 문의에 대한 정부 입장과 그에 대한 반발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번 제2회 ‘김구는 애국가 작자를 알고 있었다’에서는 이 기조를 재확인하는 차원에서 악보의 해설을 살피기로 한다. 해방이 되어 환국을 고대하던 중인 10월 18일 김구의 친필로 제목을 단 악보이다. 비용은 중국국민당 정부와 한중 우호를 위해 설립한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가 담당했고, 악보전문 출판사인 음악월간사(音樂月刊社)가 출판했다. 당연히 원고와 편집 등의 업무는 측근인 엄항섭(嚴恒燮)과 민필호(閔弼鎬)가 전담하였다. 해방을 맞아 귀국을 준비하는 와중에서 애국가 악보를 발행하려 한 것은 애국가의 위상을 홍보하고, 김구 주석을 부각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런데 이 악보가 수록한 ‘한국 애국가에 관한 고사(古事)’ 부분은 매우 주목된다. 비록 단출하지만 애국가의 연혁과 작사자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단 두 문장으로 구성된 전문은 이렇다. "이 애국가는 50년 전에 한 한국 애국지사의 수필(手筆)로 창작되었는데, 이미 일명(佚名)해 버렸다. 처음에 서양 명곡을 채용하여 가사를 메워 노래를 불렀는데, 그 후 한국의 인사들이 안된다고 생각하여 10년 전에 한국 청년음악가가 새로운 곡조를 지으므로 말미암아 곧 한국 건국운동 중에 국가를 대신하게 되었다.” 내용을 분석하면 다음 네 가지 점을 주목하게 된다. 하나는 작사 시점의 제시다. 즉, 1945년 시점에서 ‘50년 전’을 대입하면 1895년이다. 이는 ‘조선개국 기원 505회’ 기념식에서 애국가와 동일 후렴의 ‘무궁화가’를 발표한 시점과 2년의 차이가 있지만 이 노래의 작사 시점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이 때는 안창호의 나이가 17세 때이다. 이 연치(年齒)는 국가적 행사에 노래를 지어 발표할 위치가 아니다. 그러나 윤치호는 30세로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상해 중서서원(中書書院)에서 교수로 있다가 귀국하여 외부협판직을 맡는 등의 능력과 직위로 ‘무궁화가’를 지어 발표할만한 인물일 수 있는 것이다.(안창호의 연치 문제는 1955년 4월 서울신문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 보도에서 지적된 바이고, 윤치호의 능력에 대해서는 서재필이 ‘무궁화가’를 작사한 윤치호를 ‘한국의 계관시인’으로 표현한 데서 알 수 있다.) 둘은 ‘10년 전~ 새로운 곡조를 지어’란 시점이다. 이는 안익태가 ‘올드랭 사인’ 곡조를 대체할 ‘신곡보 애국가’를 작곡한 1935년과 정확히 일치한다. 임시정부가 이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던 배경은 1940년 북미 대한인국민회의 요청에 따라 ‘안익태 곡보 사용 허가’를 한 바가 있어 이때 관련 정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셋은 이렇게 정확하게 작사와 작곡 시점을 표명하는 상황에서 그 작사자에 대해서만은 "오래전에 숨은 이름으로 지금은 알 수 없다”라는 의미로 "佚名해 버렸다”라고 한 인물의 문제다. ‘일명’이란 낯선 용어는 ‘미상’이거나 ‘모른다’는 표현을 피하기 위한 의도적인 익명화(匿名化)이다. 이의 주인공은 임정요인으로 활동하다 7년 전인 1938년 작고한 안창호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임시정부, 좁게는 김구와 그 측근들이 안창호란 이름을 숨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창호를 ‘한 한국 애국지사’라는 표현은 부적합한 표현이다. 그러나 이 시기 윤치호에 대해서는 ‘한 한국 애국지사’라는 표현이 가능하다. 이런 정황은 지난 제1회에서 살핀 임시의정원 ‘애국가 수정안’의 발의와 그에 대한 처리 결과를 통해 윤치호를 작사자로 확인한 과정과 같은 것이다. 결론적으로 악보의 ‘한국애국가에 관한 고사(古事)’ 부분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이 해석 외의 결론은 탈맥락적이다. 가령 "북한에 거부감을 주지 않기 위해 안창호가 작사자라는 사실을 숨긴 것”이란 주장 같은 것을 말한다. 이는 의도적인 왜곡이거나 문해력을 의심받을 만한 해석이다. "1945년 임시정부 김구와 그 측근들은 애국가 작사자를 알고 있었다. 작사자는 바로 윤치호이다. 다만 윤치호를 작사자로 내세우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50년 전 한 한국 애국지사’로 지금은 ‘숨은 이름’이라고 하여 적대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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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 (42) <br>이광수 명인의 '부포놀음' 춤사위부포놀음 2014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등재가 된 농악은 타악 합주(관악기 포함), 행진, 춤, 연극, 기예의 요소가 한데 어우러진 종합예술 장르이다. 특히 개인놀이에 쓰이는 '부포놀음'은 사사, 산치기, 퍼넘기기, 배미르기, 돛대치기, 좌우치기, 연봉놀이, 공중매기, 용솟음, 이슬털이 등이 있다. 변화무상한 장단 안에서 부포짓과 함께 다양한 허튼 춤사위를 연행한다. 농악에서 뽑아 낸 사물놀이의 백미는 판굿에서 이어지는 개인 놀이라 할 수 있다. 이광수 명인은 자신만의 독특한 꽹과리 가락과 어우러지는 부포놀음 무보를 가지고 있다. 이광수의 부포놀음은 각 지역 농악의 '부포놀음'들에 이광수의 뛰어난 허튼 춤사위들이 녹아 들어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지에 이른다. 디딤과 호흡에서 즉흥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부포 동작들은 이광수의 꽹과리 가락과 어우러져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곤 한다. 일정한 패턴이 없어 보이는 그의 가락과 동작들 속에서 세련되고 정제된 허튼 춤사위의 진수에서 한민족 전통의 전율을 온몸으로 느껴본다. 부포가 놀아대는 춤사위를 따라가던 두 눈은 봄날의 아지랭이 피어오르듯 어질어질하다. 이광수 1952년 충남 예산 출생 1957년 남사당패 입문 1978년 사물놀이 창단 1993년 민족음악원 창단 (現) (사) 민족음악원 이사장 1962년 전국농악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 1997년 12월 17일 'KBS국악대상' 단체 연주상 수상 2000년 1월 17일 (私) 국악협회 공로상 수상 2009년 9월 3일 제36회 한국방송대상 국악인부문 수상 2011년 12월 (사)한국예총 예술문화상 대상 수상 2014년 5월 14일 충남전통예술강사협동조합 설립 (現) 충남전통예술강사협동조합 이사장 2015년 12월 4일 대한민국 한류대상 수상 2019년 2월 27일 한국국악대상 수상(주관:한국국악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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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김대환선생에 대한 회고, 네 장면(上)‘마음대로의 음악’을 하며 살다 간 드러머이며 미각세서가微刻細書家 김대환 선생. 3월 1일 기일忌日이다. 열아홉 번째 추모 공연이 ‘한국문화의 집(KOUS)’에서 열렸다. 입구에서 오랜만에 남소유 화백를 뵈었다. 너무나 반가웠다. ‘인사동 문화’를 쌓아 온 어른들 중 한분이기에 남다르다. ‘쌀밥이 맛있는 집’ 부산집 식당 주인으로부터 고서점 한국서적 사장까지 또래의 어르신들을 먼저 보낸 헛헛함이 꾸민 모습에서 진하게 느껴졌다. 매번의 추모공연이 그러했듯이 사물놀이 명인 이광수의 비나리 축원덕담과 김대환 선생에 대한 회고담으로 문을 열고, 소리꾼 장사익의 노래와 인사말로 여몄다. 인사말에서는 삼일절 일본 출연자가 함께하는 이유를 "음악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함께 어울려 할 수 있는 예술"이라며 함께 아리랑 합창으로 여몄다. 그 안에는 김선생과 소시적부터 함께했던 원로 뮤지션과 연배는 차이 있으나 이런 저런 인연을 맺은 젊은 뮤지션들, 일본에서 활동하던 시절 인연을 맺어 매년 추모행사에 참여하는 일본 노가쿠와 부토 연주자의 무대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외의 출연자가 있었다. 영화 1968년 개봉된 명화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여주인공 문희(본명 이순임李順任)여사의 무대가 있었다.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의 창으로 출연한 것이다. 그 자태와 함께 떨림이 담긴 청은 남다른 매력을 발산했다. 영정 사진과 포스터를 이젤 거치대에 올린 단촐한 무대, 오늘 행사 주제와는 너무 먼 사회자의 너스레, 퓨리 뮤직Free music이란 80년대 일본 재즈계의 이색적인 풍경, 제1회부터의 난해성 짙은 추모행사다. 아니 어쩌면 19년전 연세대학병원 김대환 선생 장례식장에서부터 시작된 ‘장송 굿판’ 그대이다. 무대 전환마다 다가오는 화면 속 김선생의 모습. 회상은 과거로 달려갔다. # 인사동 ‘청동시대’의 ‘아리랑’ 액자 1985년은 아리랑운동의 출발인 ‘모임 아리랑’이 활동을 시작하던 때이다. 사무실도 없고, 명확한 조직 체게도 없었지만 아리랑운동의 필요성과 전개에 대한 의지는 분명했다. 자료수집과 현장 답사를 중심으로 하는 활동이었다. 근거지는 박희준 형이 운영하는 인사동 관훈클럽 지하 까페였다. 회원들이 차茶나 한지韓紙 같은 전통문화 연구자들이고, 전국 답사 중심 단체인 ‘민학회’ 회원들이 많았다. 거의 매일 저녁이면 모여 아리랑운동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인사동 찻집 ‘청동시대’에 특이한 ‘아리랑’ 서예작품 액자가 있다는 얘기가 들렸다. ‘청동시대’는 통문관과 수도약국 사이에 있는 찻집으로 50년대 명동의 ‘공초 오상순과 청동 다방’에서 딴 것으로 짐작되어 주인은 꽤나 낭만적인 신사일 것이란 상상이 더해져 매우 궁금했다. 또한 이 시기 아리랑 서예 작품이 알려지지 않은 터여서 더욱 그랬다. 그래서 몇몇 회원과 함께 날을 잡아 오후에 찾아가게 되었다. 아리랑 후렴과 1절 가사를 작품화 했다. ‘아’자와 ‘랑’자를 독특하게 표현하였다. 낙관도 격에 맞게 찍혔다. 마침 한문학을 전공한 박희준 형이 낙관을 읽어냈다. "김대환”이다. 함께한 누구도 이 분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종업원에게 물었지만 모른다며 주인이 오후에 나오니 그때 물어보라고 했다. 이렇게 서예 작품 아리랑의 존재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작품의 주인공과 그가 누구인지를 사흘 후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김대환은 서예가가 아닌 드러머로 알려진 분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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